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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축조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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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형근 작성일 19-01-14 18:22 조회 909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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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기술되는 내용은 수원시 문화공보실에서 발행한
[우리고장의 역사와 문화]에서 수원성(화성)부분만 전문
발췌했음. ===


제 1 장 성역(城役)에 동원된 인원과 자재(資材)


1. 축성공역 책임관원(築城工役 責任官員)

총리사 1명, 감동당상 1명, 도청관원 4명, 각 공구간 또는 시설담
당 감독관 약 40명, 192명에 달하는 패장, 147명의 서리, 사령,
기수, 포졸, 사환 등이 종사하였다.
총리대신 영중추부사 채제공
감동당상 행부사직 조심태
도청 행부호군 이유경
책응도청 수원부판관 김노성
수원부판관 정동협
수원부판관 홍원섭

2. 동원된 인력

축성공역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 것은 각종 기술자들이며 그 수
는 1821명, 연일수 37만 6342.5일(0.5일은 노임지불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반일로 계산한 것임), 기술자(공장)들은 관공장,
사공장이 섞여 있고, 그 출신지도 전국 각지방에 걸쳐있으므로 당
대의 명장들을 다 모은 듯하다.

3. 사용된 자재와 신기재

수원화성이 수려하고도 견고하면서 비교적 적은 경비와 노력으로 당
시의 토목기술 수준에서 2년 반이란 짧은 기간에 완성할 수 있었
던 것은 다량의 석재를 가까이에서 채취할 수 있었고, 벽돌을 구
워 축성에 사용할 수 있었던 데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축성
에 있어서 석축으로 하느냐 토축으로 하느냐 하는 것은 당시로 봐
서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성곽 전체를 석축으로 한다면 석재의 확보와 막대한 인력을 감당
하기 어렵고 거기다가 석재만을 사용하는 경우 융통성 있고 다양
한 설계를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토축으로 하면 성이 견고할 수
가 없고, 외면은 축회를 하여야 하는데 흙과 회가 잘 밀착되지 않
아 겨울에 얼어 터질 우려가 있다. 결국 외면은 돌로 내면은 흙으
로 쌓을 수 밖에 없으나 이렇게 되면 돌이 흙에 기대게 되어 겨울
에는 얼어서 흙이 부풀고 여름에 장마가 지면 흙이 젖어서 오래
가지 않아 성 자체가 무너지는 취약성을 지니게 된다. 이런 것은
이미 반계 유형원이 수록 병제편에서 이론적으로 지적하고 있었
다.

다행히 석재는 팔달산 서쪽 공석면에 많은 량이 있음을 알았는데
팔달산 서쪽으로 바로 보이는 건너편 숙지산과 또 거기서 5리 지
점에 있는 여기산에 가서 찾아보았더니 처음에는 모두 흙으로만
덮여 돌맥이 있을 줄은 생각치 못했다가 흙을 파헤쳐 보니 두 산
에서 무진장의 돌맥을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은 공사착수 1개월 전
의 일로 정말 기적이었다.

채제공은 왕에게 ?팔달산 바로 건너편, 읍에서 불과 3리 밖에 안
되는 곳에 좋은 석재가 무진장하게 묻혀 있는데 그 지역을 공석면
이라 하니, 신이 생각하옵건대 이것은 신령께서 오늘에 쓰임을 기
다려 깊이 감추어 둔 것이니 성상의 지극하신 효성을 하늘이 알아
주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그후 권동의 석록산과 아어산, 그리고 팔달산 남록에서도 석맥이
발견되었으며 이 석재로서 서성에 쓰일 돌은 거의 충당되었으니
더 이상의 행운이 없엇다. 여기서 채취한 석재는 총 18만 7,600괴
나 되었다. 축성공사의 착수 직전까지도 벽돌을 단단하게 구울 자
신이 없어 이론이 분분하였으나 성역의궤는 벽돌을 구운 방법과
성역에 사용한 벽돌의 여러 종류를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다.

기초와 문루는 석재로 성벽은 벽돌로 쌓을 것에 단을 내리고, 그
것을 굽도록 과감히 지시한 조관총찰 채제공의 단안이 훌륭했음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벽돌은 각종 대소를 합하여 69
만 5,000여장이 구워졌었다.

이 공사에 사용된 중요 자재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 석재 20만 1,404괴(괴, 대성석·중성석·소성석 포함)
◇ 목재 2만 6,206주
◇ 철물 55만 9,030근
◇ 숯 6만 9,030석
◇ 개와류 52만 8,989장
◇ 벽돌 69만 4,919장(대방전 2만 8,271, 소방전 3,175,
반방전 58만 292개 등)
◇ 석회 8만 6,442석
◇ 우 688필, 마 252필

이 밖에 8,000권이 넘는 각종 지류와 단청용 물감 및 297동의 각
종 붓, 103동의 흑이 들었고 5만 9,600립의 공석을 위시하여 수많
은 잡물이 소요되었다.

성역에 쓰인 중요 자재는 석재, 목재, 전돌, 기와 등으로 이들 거
대한 석괴?장대한 목재를 운반하거나 또는 높은 곳에 들어올리
는 데는 현대의 크레인이나 윈치 등과 같은 원리의 도르래를 이용
한 거중기, 녹로 등 기기를 특수하게 고안하여 사용하였다. 다만
이에 사용된 동력은 인력과 우마력이었다. 이외에도 발차·동차·
설마 등 운반기구 및 토사용기구 등과 각종 재래기구를 사용하였
는데 그중에서도 정다산이 제작법을 가르쳐 사용하게 된 것으로
유명한 활차와 거중기이다.

정조가 다산에게 기기도설이라는 내장도서 한 권을 내려주어서 그
걸 참고하여 자신의 창의를 가미해서 만든 것이라 한다. 그 구조
는 (그림을 참조하여야 하나 우리의 국사교과서에 나왔으므로 기
억을 더듬기 바람) 들어올막졍?물체는 상하 각각 8개의 이동활
차(도르래)에 걸리고, 그것은 다시 8개의 고정활차에 연결된다.
그리고 그것들을 좌우 양쪽의 큰 활차에 걸어서 거중기의 얼레바
퀴에 감기게 한 것이다. 물체를 걸어 올릴 때는 좌우에서 얼레바
퀴를 같은 속도로 돌려 중량물이 기울거나 무게가 한쪽으로 쏠리
지 않게 하고 감아 올리는 힘도 양쪽이 고르게 하여야 한다.

실제 거중기의 조작에 있어서는 좌우에 각각 15명의 장정이 1만
2,000근(근:7.2톤)이나 되는 물체를 이 거중기를 써서 순식간에
들어 올렸다고 화성성역의궤에서 설명하고있다. 장정 한사람이 일
시에 400척(척:240kg)의 무게를 들어 올린 셈인데 다산은 거중도
설에서 이러한 원리를 설명하고 40근의 힘으로 능히 2만 5,000근
의 무게를 움직일수 있다 하고, 어린아이의 한 손으로 수만 근의
무게를 움직일 수 있으니 축성에 있어서 석재를 다루는데 무겁고
큰 것이 문제되지 않고 석축할 제자리에 손쉽게 들어 올려 놓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이 공역에 많은 수레와 기재를 실용화하였는데 거중기
보다 얼게가 조금 간단한 녹로로도 조금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리
거나 이동시켰으며 윱堉?犬?원주목 등 큰 석재와 큰 목재를 운
반하기 위해 대차라는 우차 8량이 사용되었으며 대차보다는 약간
규모가 작으나 중석이나 루주 등이 이동을 위하여 소가 이끄는 별
평차 17량과 평차 76량이 사용되었으며 좀더 작은 발차 2량과 사
람의 손으로 끄는 동차 192량 그리고 구판, 설마 등의 운반 용구
가 제작 사용되었으며 석괴나 목재의 상하차에 편리하고 수레바퀴
가 튼튼한 유형거란 것도 제작되어 11량이 사용되었다.


** 수원성(화성) 자료 **


◇ 암 문

성곽의 제도에서 암문을 두는 목적은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적에
게 들키지 않고 빠져나가 구원을 요청하거나 배후공격을 할 수 있
는 연락을 취하거나 군수품을 조달하는데 있다. 따라서 암문의 위
치는 대개 성곽의 굴곡진 곳이나 수목에 가려서 외부에서 직접 보
이지 않는 곳에 위치하게된다.

북암문은 성벽이 좌우로 휘어 암문에 접속되므로 성외에서 암문
을 보면 암문이 우묵진 곳에 붙어잇게 되므로 그림자가 그 옆의 용
연 주변의 수목에 가려 눈에 쉽게 보이지않도록 배치되어 있고, 성
내측의 경사진 지면은 석축으로 막고 있다.

서암문은 서장대의 팔달산 기슭에 위치하여 성내의 지반은 높고 성
외는 낮아서 성내에서 계단으로 내려가서 홍예문을 통하여 성밖으
로 나가게 된다. 이곳은 지형상 북암문이나 동암문과 같이 성곽을
깊게 하여 암문을 설치하기 곤란하므로 암문을 옆으로 틀어앉히고
있어서 성곽 옆에 가까이 접근하기 전에는 암문의 위치를 알 수 없
게 되어 있다.

서남암문은 화양루로 나가는 암문으로써 유일하게 암문위에 포사 1
칸을 세우고 있다.


◇ 수 문

수문은 수원천(광교천)의 북쪽, 남쪽의 2개소에 있었다. 북쪽의 화
홍문은 7문의 ?뉨예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마루 형식의 누각
을 세웠다.주초석은 높이 94cm에 윗면이 45cm각인 사다리꼴의 석
재를 사용하였으며 지름 30cm, 높이 3,13m의 원기둥에 창방, 굴도
리, 장여를 사용하여 주두와 소로수장의 초익공으로 하였고, 처마
는 겹처마이다. 지붕틀은 5량에 합각(팔작)지붕이며 종량위에 판대
공˙을 세우고 창방과 종도리를 받게 하였다. 마루는 우물마루이
고 전면과 측면 1칸은 머름중방을 끼우고 수면을 그린 판문을 달
았다. 좌우측면에는 돌계단을 두어 누상에 오르게 하였고, 그 1칸
에는 문을 달도록 되어 있으며 루 밑의 측면벽은 계단과 벽을 1칸
을 막고 또 2칸은 전돌 화문벽으로 쌓았다.

누각의 건축면적은 52.89㎡(16.03평)이다. 7칸의 수문홍예 중 중
앙의 1칸만이 높고 폭도 넓으나 나머지는 모두 같다. 수문의 외측
에는 철전문을 설치하였다. 남쪽의 남수문은 문루는 없고, 9칸의
홍예를 틀고 철전문을 설치하였다. 북수문과 다른 것은 다리 위에
28.8m의 다리 길이 만큼과 다리 넓이의 3분의 2정도의 폭 3.84m 높
이 2.7m의 장포를 벽돌로 설치하고, 성 안쪽으로 세군데에 홍예출
입문을 내었다. 바깥쪽에는 3층으로 57개의 포혈을 내어 전천후적
으로 적을 요격할 수 있게 했으며 이장포의 천장은 평평하게 하여
벽돌을 깔아서 그 위에 수백명을 수용할 수 있게 했다.

그 바깥 쪽에 크고 둥근 벽돌 여장을 9개 설치하고 각각 총안 3개
씩을 놓았으며 원여장 사이에 방여장 8개를 설치하여 사이를 막고
있고 여기에도 총안 하나씩을 뚫어놓았다.

˙판대공 : 두꺼운 널을 쓴 대공


◇ 장 대

장대는 2개소가 있는데 서장대는 팔달산정의 높은 위치에 있어 수
원성 전역을 굽어 살필 수 있고 동장대는 수원성 동쪽 평지에 있으
나 성외는 경사지를 이루고있다. 서장대는 2층누각으로 상층은 정
면, 측면 각각 1칸의 모임지붕으로 되어 있다. 1층의 건축면적
은 64.64㎡(19.55평)이고 2층은 16.16㎡(4.89평)으로 연면적 80.8
㎡(24.44평)이다. 1층의 외진 기둥은 민흘림이고 초익공 굴도리 겹
처마로 되어 있다. 2층 기둥은 1층의 내진주를 장통주˙로 하였
으며 기둥의 높이는 6.4m이다. 2층 기둥위에 장여와 창방을 돌리
고 주두와 소로를 놓고 굴도리 및 장여를 받게 하였다. 굴도리 위
에 동서방향으로 우미량˙을 걸었으며 그 위에 쇠서를+자로 짜고
정자로 중도리를 짜서 서까래를 받게 하였다. 또 우미량의 중앙에
절병통을 받는 심주를 세우고 사우에서 모이는 추녀를 받게 하였다.

동장대의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건축면적 143.37㎡(43.4
평)이며 단층 팔작지붕이다. 68cm각, 높이 47cm의 주초석 위에 지
름 48cm의 원기둥을 세웠으며 기둥의 높이는 주초석 위에서 주두밑
까지 3.37m이고외1출목 초익공 7량이다. 내진주는 지름 48cm, 높
이 4.40m의 고주로 하고 전후로 퇴량을 걸고 외평주 및 내고주 위
에 창방을 걸었으며 지름 35cm의 굴도리와 장여를 소모받침으로 걸
었다. 앞 뒤의 고주에 장보(40~50cm)를 걸고, 동자주를 세워 종량
의 보아지와 중도리의 장여 밑에 첨차를 끼우고 주두위에 종량과
중도리, 장여를 걸었다. 또 종량위에 파련대공을 세우고 뜬 창방을
건너지른 위에 화반과 운공을 써서 용마루도리 및 장여를 받게하였
다.

˙장통주 : 2층까지의 기둥이 한 기둥으로 된 긴 기둥
˙우미량 : 도리나 보어 걸쳐 대어 동자 기둥을 받는



◇ 공심돈

공심돈은 모두 3개소가 있으며 서북공심돈은 성벽 상부에서 3층 구
조를 이루고 있다. 1층과 2층의 외벽과 3층의 하부는 전돌로 쌓
고 내부는 목조의 기둥과 보도리 마루귀틀 등으로 설치하였다. 성
벽의 각 면에는 현안을 두어 내부 1층 바닥에서 성에 접근하는 적
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성 위에는 전돌로 2층과 그 위 여장
을 쌓고, 각층에는 총화기를 쏠 수 있는 총안을 내었다. 내부에는
전돌의 벽에 붙여 네 모서리에 각 기둥을 세워 2층과 3층을 구성하
고 3층은 5량의 팔작지붕 망루를 세웠다. 1층과 2층의 벽면에는 2
단으로 총안을, 2층의 벽면위에는 2단으로 총안과 표혈을 두고, 3
층에는 여장에 1단으로 총안을 두었다. 공심돈의 성벽 높이 약5m이
고 전돌 부분은 성 위에서 5.14m 처마 높이는 성 위에서 도리밑까
지 6.27m이다.

동북공심돈은 타원의 원주형에 출입구는 남쪽으로 냈으며 동서로
약 12m 남북으로 약 10.5m이다. 모서리는 원형으로 돌리고 외벽은
지대 2~3단을 화강석으로 쌓고, 그 위에는 두께 1.05m의 벽을 전
돌로 쌓았으며 내부의 통로폭은 1.2m를 남겼다. 내벽은 외벽과 같
은 동심원 형태로 두께 65cm의 전돌벽을 쌓고, 그 속은 진흙을 넣
어 다졌다. 1층 출입구 내부는 넓게 하고 우측에 온돌을 축조한 방
을 두고, 입구의 좌측에서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는 통로가 위로 올
라가는 계단과 연결되며 이 계단은 중간에서 꺽이어 공심돈의 중
심부를 통하여 상층을 향해서 올라가는 전돌계단을 꾸몄다. 그래
서 속칭 소라각이라고도 한다. 돈대의 전체 높이는 6.8m나 된다.
각층의 3면에는 상하 2단으로 총안과 포혈을 두었고, 특히 가운데
층에는 열쇠구멍처럼 생긴 전안을 두었으며 상층의 여장 밑에는 배
수를 위한 누혈을 두었다. 상층의 누각은 목조로 하고, 전면2칸 측
면 1칸으로 건축면적은 11.53㎡(3.5평)이다. 지붕은 우진각이고 동
측의 처마도리 위에는 대공까지 우미량을 걸고 3량 구조에 홑처마
이다. 남공심돈의 제도는 북공심돈과 같으나 벽축의 각면 모서리가
예각으로 된 것이 다를 뿐이다.



◇ 각 루

각루는 모두 4개소 있다. 성곽의 우각부의 요소에 자리하여 성밖으
로 원거리 전망도 좋은 위치에 있다. 서북각루는 정면, 측면 각2칸
에 건축면적 35.64㎡(10.78평)의 누각이며 누마루 밑 아래층 1칸은
온돌방을 설치한 것으로 별 큰 특징은 없다.

동북각루는 정면 및 남측면은 2칸이나 북측면은 2칸을 통칸으로 하
였고 건축면적은 1층, 2층 각각 18.84㎡(5.7평)으로 연면적 37.68
㎡(11.4평)이다. 규모와 제도는 서북각루와 비슷하다.

서남각루는 일명 화양루라고도 하며 서남암문에서 용도를 통하여
뻗어나간 외성의 끝부분에 있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건축
면적 29.04㎡(8.8평)이다. 다만 북측면은 통2칸으로 되어 중간기둥
이 없다. 3량 팔작지붕에 납도리를 쓰고 처마 길이 1.2m의 홑처마
이다. 남측면 2칸은 우물마루를 깔고 그 외에는 방전을 깔았다. 마
루방의 3면에는 중방위에 전판문을 달고 북측면에는 머름중방 위에
여닫이 세살창문 4짝씩 달았다. 북측면 통칸에는 창방을 건너지르
고 소로수장으로 하였다.

동북각루는 일명 방화수류정이라 하는데 세간에 너무 많이 알려져
있을 정도로 그 건축미는 화려하고 또 우아하다. 상하 중층의 누각
으로써 누각 하층의 바닥면적은 46.9㎡(14.18평)이고, 상층의 바닥
면적도 같으나 북측면에는 성곽위로 퇴마루를 달아내고 난간을 설
치하였다. 북측면은 8각형의 평면을 다루고 남측면은 ㄱ자형 평면
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으 평면은 매우 복잡한 형태로 구성되었다.
높이 1.55m이고, 위쪽은 40cm각 아래쪽은 50cm각의 주초석 위에 지
름 30cm, 높이 90cm인 원형의 기둥을 세우고, 2층 기둥을 각주로
하여 세웠다. 이 건물은 초익공, 수로수장에 굴도리를 사용한 5량
집이다. 상층의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주위에는 계자난간˙
과 평란을 둘렀다. 상층기둥은 22.5cm 각주 높이 24m이고, 하층기
둥은 지름 30cm의 원주로 높은 초석 위에 세웠다. 겹처마에 처마길
이는 서까래 90cm, 부연 45cm로 합계 1.35m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으
로 하였다. 지붕의 추녀마루는 도리방향에 대하여 45도 각도가 아
닌 한편으로 치우치게 된 부분도 있다. 하층 바닥에서 상층 바닥까
지의 높이는 약 1.36m, 기단 높이는 1.23m이다. 하층의 동남 1칸에
는 온돌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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