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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치마을 당산나무 보호수 지정의뢰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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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덕진 작성일 10-06-10 00:00 조회 1,28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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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면 간상리 561번지 일원의 고목의 보호수 신청을 창녕군청 환경산림과와 산림청에 의뢰함.

*수종; 느티나무
*수령; 구전으로는 임진왜란 전후시기부터 약 400여년이나 또 다른 구전으로는 조선초기부터 약 600이나 그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전문가의 정확한 진단이 필요함.

# 간상리 간적(시치)마을의 유래

간적 골짜기에는 3개의 마을이 있다. 창녕말로써 안담(웃마), 중마, 아랫마 등으로 불리는데, 예로부터 시치라고 하면 웃마를 일컫는데 근래 들어와서는 중마와 아랫마도 시치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각종 문헌상으로 고찰하건데, 시치는 임진왜란 전부터 사람이 거주한 것으로 판단되며, 구전에 의하면 고려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이유는 시치에는 골짜기가 2곳이 있는데 현재의 간적 소류지(저수지)옆의 산밭골이라는 조그만 골짜기가와 현재 창녕장씨의 재실이 있는 골짜기 2곳이다. 장씨가 터전을 잡기 전에 시치의 안쪽 산밭골에는 김씨들이 누대에 걸쳐 거주 하였으며, 일제시대 까지만 해도 산밭골에는 수가구가 거주하였으며, 현재는 모두 없어지고 밭으로 사용 중이며, 간혹 기와조각이나 도자기 조각 등이 발견되어 오래전부터 거주지였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지금도 김씨 문중의 선산이 산밭골 위에 위치하여 묘사 등 사람의 왕래가 있다.
시치가 고려시대부터 사람의 거주지였다는 또다른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시치라는 말이 고려시대에 지어졌다는 사실이다. ‘시’는 시냇물 즉 澗(산골물 간)의 몽고말이며 ‘치’는 赤(붉을 적)의 몽고 말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려시대부터 거주지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몽고인들의 영향력이 있던 고려중기 이후부터 김씨들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그 이후 장씨들이 입향하여 인접한 골짜기에 집성촌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의 유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래로 당산나무는 마을의 동남쪽에 입구에 위치하여 그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의 역할을 해왔으므로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이후 조선시대에 시치는 간적(澗赤)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또다른 이론은 임진왜란때에 인접한 대산성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로 인하여 시내물이 붉게 물들었다 해서 간적으로 명명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일제시대부터 지명 개편 시에 과거의 역사를 지우려고 간상리라는 지명으로 개칭했다는 동네 원로의 구전도 있다.
현재 시치에는 창녕 장씨가 주축이 되어 마을을 형성하고 있으며 오래된 선산과 각종 비석, 재실이 있으나 여타 마을처럼 거주자가 해마다 감소하는 추세이다.

# 당산나무관련 역사
시치입구언덕에 우뚝 솟은 당산나무는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도 예사롭게 보지 않지만 유구한 역사와 전래되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은 주변의 공장건립으로 인하여 나무 바로 옆까지 이루어진 정지작업으로 인하여 고사의 위기에 놓여있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게 하고 있다.
당산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이 많지 않아 구전되는 자료를 문답형으로 간략하게나마 간추려 본다.

1. 보호수로서 지정되려면 거대수라야 된다?
물론 나무의 크기도 중요하다. 하지만 볼품없는 바위 하나라도 그 얽힌 이야기와 역사가 중요하여 역사자료로 지정되기도 한다. 시치의 당산나무는 역사에 나오는 우국충절의 격전의 현장에서 유구한 세월을 많은 사연을 안고 꿋꿋하게 지켜왔다. 그냥 여타 거대수처럼 마을입구에 우람하게 위세만 자랑하는 나무가 아니다.
2. 추정되는 수령에 비해 나무가 왜 작나?
시치골짜기는 척박하다. 지대도 높고 물도 귀하다. 지하수 관정을 뚫으려면 최소 10회는 뚫을 정도로 수맥을 찾기가 어렵다. 그리고 땅을 파보면 밑에는 퇴적암의 일종인 점판암으로 추정되는 청석이 나무주변에 있다. 시치 마을 우물도 마찬가지이다. 딱딱한 퇴적암이 지표밑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는 나무도 살기 어렵고 거대수로 되기도 어렵다. 그래서 당산나무는 겨우겨우 긴 세월을 주민들의 보살핌 속에서 지내왔던 것이다.

3. 느티나무로서는 독특한 모양인데?
척박한 토양에서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하고 뿌리가 노출된 것도 있다. 그리고 일반 느티나무와는 달리 지표면위에서 가지끼리 붙어 자르는 모습이다. 그래서 동체의 둘레는 수령에 비해 크지는 않고 지표면위에서부터 가지가 바로 벌어진 아주 희귀한 모양을 하고 있다.
전문가의 감정을 해봐야겠지만 느티나무 중에서도 아주 희귀한 생장을 보이는 것으로 이 자체만으로도 보호수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4. 그럼 그동안 나무의 관리는 어떻게 해왔나?
나무관리의 주체는 시치(안담)주민들이며 중마와 아랫마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이 성립될 때부터 1998년까지 매년 동제가 이루어져 왔으며, 장씨 문중에서 나무의 생장과 보호를 위해 자발적인 관리를 해 왔었다. 예를 들면
농번기의 힘든 일이 끝나면 동네 머슴들의 1주 휴가가 있었다 한다. 이때에는 매년 정기적으로 머슴들이 당산나무 밑에서 술을 받아 예를 표하고 암석 지반위에 힘겹게 자라는 나무에게 영양을 공급하기 위하여 그동안 소실된 흙을 보충해주고 객토와 북을 돋우는 작업을 해왔었고 기후 변화에 따라 장씨 문중과 함께 수시로 나무를 돌봐왔었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이후 사회적인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머슴들이 하지 아니하고 장 문중에서 수시로 나무를 관리해 왔었다. 최근 주민숫자의 급감으로 이제는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결정적으로 공장이 들어선다며 파헤친 주변 토양으로 인하여 근근이 버텨오던 고목이 이제는 고사 일보 직전까지 갔으며, 벌써 일부는 고사가 시작되고 있는 현실이다.

5. 역사가 있어야 보호수의 가치가 있는데?
바로 인접한 대산성은 왜군의 북상으로 패퇴하던 우리 고을의 관군민이 남은 전력을 집중해서 창녕의 최후의 보루로써 시치를 활용하였다. 물론 화왕산성이 역사적으로 조명을 받고 있지만, 대산성과 시치는 말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우리 조상들의 피와 얼이 면면히 흐르는 지역이다. 그리고 뒷산은 왕령산성이 위치하여 당산나무는 두 산성과 마을을 지켜주며 오랜 세월 역사를 간직한 나무인 것이다.
당산나무 옆의 대산성에서는 신압 장군과 조진남, 노홍언, 장효원 등 현지 거주 선비들이 주축이 되어 대산과 그 인근에 목책산성을 쌓아 결사 항전한 내용은 역사자료에 있으며 현재 창녕공고 근처 억만리 ‘고연정’에 ‘효절각’에 그 내용을 담은 비석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동네를 묵묵히 지켜봐온 역사적 사실만 보아도 물 좋고 토질 좋은 다른 농촌 마을 앞에 위풍당당하게 위치한 거대한 정자나무와는 차별화 되는 사실이다.

6. 당산나무에 전해 내려오는 다른 이야기는 없는가?
1) 시치마을에는 예로부터 전염병이 들어오지 못하는 동네라고 했다.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할 때에도 시치역사상 한 번도 마을까지 전염된 경우가 없었다. 기타 큰 전염병도 당산나무가 지켜줘서 들어오지 못해서 모두들 신령스런 나무로서 모셨다고 하며, 남녀노소 모두들 병이 있으면 당산나무에서 제를 지냈다고 전해 내려온다.
2) 풍수나 특정종교인이나 또는 무속인, 도인 등 ‘기’를 느끼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처음 방문 할 때에는 당산나무 앞에서 이상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손이 떨린다던지, 신 내림 현상이나 빙의현상 등 특수한 현상이 생겨 정성을 들이거나 예를 표하고 나면 그것이 해소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오히려 마을사람들에게 더욱 정성을 들이고 잘 모시라고 조언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해온다.
3) 조선시대에는 나무를 손대려고 했던 사람들은 모두 좋지 않은 경험을 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나무의 신령함을 모르는 사람이 밭에 그늘이 낀다고 나뭇가지를 전지하려고 하면 낫이 계속 부러지고 , 나무뿌리가 밭에 지장을 준다고 손을 대려면 모든 농기구가 부러져서 그 이후에는 누구도 나무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4)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나 민간신앙 행사를 할때에는 항상 당산나무에서 행해졌었다. 특히, 타지의 무속인들이 자주 왕래하며 제를 올려 왔으며, 드물지만 최근까지도 무속행사가 이루어져 왔었다.
5) 임진왜란 때 대산성 전투당시 전사하신 조상님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동제를 당산나무에서 지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구전되어 오므로 조상의 추모와 주민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종합적인 의미로서의 동제가 이어져 왔던 것이다.

7. 당산나무에서 동제를 어떻게 지냈는가?

1) 시치마을에는 매년 각종 중요 절기(정월 대보름, 한가위)와 마을의 중요 제례 행사(묘사 등) 때에는 마을 뒷산 왕령산성 밑에 위치한 작은 암자( ‘정신집’이라고 불렸음, 현재는 흔적만 있음)에서 먼저 제를 올리고, 재실 뒤에 위치한 큰 소나무에서 산신제를 올리고 당산나무에도 제를 정기적으로 지내왔었다.
제관은 주로 시치마을의 종가에서 2-3인이 주관이 되어 행해졌으며 최근까지 장두혁(1998년 작고)씨가 이어 왔었다.
2) 당산나무 동제는 마을의 가장 중요행사 중의 하나였으므로, 마을사람 남녀노소 모두 참석했었다. 그래서 제관들은 수일 전부터는 불필요한 바깥 출입을 삼가고 매일 목욕제계(沐浴祭戒)를 하면서 정성껏 제물을 준비하였으며, 아이들도 목욕을 시켜 깨끗하게 동제준비를 했다한다.
3) 그 외에 나라에 전염병이 돈다던지 문중이나 개인의 우환이 있을 때에는 비정기적으로 제를 올렸었다. 최근에는 원로들이 점점 줄고, 객지의 자식들 집에서 거주하므로 명절에만 동네에 사람이 보일 정도로 거주민이 급감하였다. 그래서 동제는 이루어지지 않고, 개인적으로 집안일로 제를 올리는 경우는 아직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산나무의 역사를 모두 알고 있으며, 아직도 원로들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기고 있다. 공사가 시작된 후 급격히 상태가 나빠진 나무를 보면서 고향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은 안타까움과 심지어는 두려움도 느끼는 사람도 있는 현실이다.

8. 당산나무와 공사가 무슨 상관있나?
위에 언급한 대로 암반지반위에 오랜 세월을 근근이 버텨온 것만 해도 느티나무 중에서 드문 예이며, 모양도 희귀하여 보기 힘든 것이다. 옛날부터 시치 마을 사람들이 나무에 지속적으로 적절한 토양과 수분 등 주변여건을 지속적으로 유지시켜 주어서 유지 된 것을 공장 건립공사를 한답시고 주변 땅을 파헤치는 바람에 수맥공급이 지장을 받게 되고 주변토양에서의 영양공급에 차질이 생겨 황폐화가 진행된다고 판단된다. 전문가의 정확한 진단과 치료가 시급히 요구되는 상황이다. 보호수 지정도 중요하지만 ‘사람부터 살리자’는 말이 있듯이 나무부터 살리기를 간절히 호소하는 바입니다 !!
그리고 공장설립에도 우호적으로 대하던 주민들과 출향인사들이 마음의 고향이 파헤쳐지는 주변여건과 나무를 보면서 점점 더 실망감과 분노심이 생기기 시작하는 등 향후 사태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인 상황이므로 관계 관청의 적극적인 개입이 요구되는 바이다.

# 당산나무 인접 대산성과 시치마을 및
관련인물의 간략한 요약.

* 창녕군 고암면 간상리 간적마을(= 시치 마을= 안담)
우리의 고향인 시치에는 약 500년 전부터 조상님들이 거주하신 것으로 문헌상 추정이 됩니다. (참고자료; 족보, 인터넷 홈피주소; www.cnjang.com; 네이버에서 창녕장씨“를 치면 나옵니다.)

1. 장효원 ( 대산성에서 전사하신 조상님)
성명(姓名) 장효원(張孝遠)
본관(本貫) 창녕(昌寧); 과거에는 창녕의 옛명칭인 하산(夏山)으로도 표기.
이력(履歷)
창녕군(인물)
장효원(張孝遠)
창녕인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왜적(倭賊)이 아비를 죽이려하므로 자기 몸으로 아비를 엄폐(掩蔽)하다 죽었다. 이 일이 알려져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창녕군 고암(高岩)에 정려(旌閭)가 있다.
참고문헌;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이십육(二十六)

● 효행열전(孝行列傳)
장효원(張孝遠) 창녕(昌寧) 임진왜란(壬辰倭亂)때 부친(父親)를 구하다 동시(同時)에 순절(殉節) 했다.

문헌(文獻)
1. 창녕금석문(昌寧金石文)
1998년 12월 31일 발행(發行)
효절각(孝節閣)
고암면(高岩面) 억만리(億万里) 고연정(高淵亭)
효자(孝子) 조진남(曺鎭南) 창녕(昌寧) 창의(倡義) 장군(將軍)
효자(孝子) 노홍언(盧弘彦) 장연(長淵) 진사(進士)
효자(孝子) 장효원(張孝遠) 창녕(昌寧) 유학(幼學)
효자(孝子) 박운(朴云) 박운산(朴云山) 형제(兄弟)
1990년 경오(庚午) 창녕(昌寧) 장병식(張炳植) 근기(謹記)

2. 영산(靈山) 사천(泗川) 신압(辛石+甲)장군; 창녕장씨 장승길의 사위.
임란시(壬亂時) 선조(宣祖) 26년 1월 11일 팔도(八道) 병마수(兵馬數) 17만 2천 400명 중(中) 영산현(靈山縣)의 주창(駐創) 의병장(義兵將) 신압(辛 石+甲)에게 병(兵) 천명(千名)이 배치(配置) 되어 상주(常駐)하면서 창녕, 영산, 현풍(昌寧, 靈山, 玄風)을 방어(防禦)하였다. 왜병(倭兵)이 침입(侵入)자 영산지역(靈山地域)에서 창의(倡義)한 공(公)은 나라를 사수(死守)하려는 애국심으로 불타는 의민향병(義民鄕兵)의 영산(靈山) 의병장에 추대(推戴)되어 향사 영산지역 수호(守護)에 전력하셨으며 창녕군 고암면 간적리(澗赤里)의 대산성(臺山城)에서 북상(北上)하는 왜군(倭軍)을 맞아 조진남(曺鎭南), 노홍언(盧弘彦), 장효원(張孝遠)등과 더불어 격전분투(激戰奮鬪)하였다.
특히 창녕 화왕산(昌寧 火旺山) 전투에서는 왜적을 수차(數次) 격퇴(擊退)시켜 향사를 수호(守護)하는데 혁혁(赫赫)한 공(功)을 세우셨다.

# 창녕장가 족보의 간략한 요약.
도시조(장씨 선대의 시조)는 고려 3태사의 한분이신 장정필(안동장씨의 시조)의 6세손인
장일(張鎰)입니다.
이력(履歷) ; 창녕군(인물)
장일(張鎰) , 장민(張敏)
창녕인 1207 (희종 3)~ 1276 (충령왕 2). 고려(高麗)~충렬왕때의 명신(名臣)이며 초명(初名)은 민(敏)이요 자(字)는 이지(弛之)이요 본관(本貫)은 창녕(昌寧)=하산(夏山)이다. 고종(高宗)때 급제(及第)하여 고종(高宗) 1년에 승평관(昇平官)을 지내고 원종때 예부시랑(禮部侍郞),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이르다.성품(性品)이 온순(溫純) 공경(恭敬)하고 정직(正直)했으며 글을 잘했고 관리(官吏)의 재목(材木)으로 뛰어 났었다. 경상도(慶尙道) 수로방호사(水路防護使)로서 난(亂)을 진압(鎭壓)하였고 뒤에 사신(史臣)으로 원(元)나라에 자주 왕래(往來)했으며 원종(元宗) 15년(1274)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고 충렬왕 즉위때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가 더해졌다.
하산군(夏山君)에 봉(封)해지고 익호(謚號)는 장간(章簡)이다.
장일(張鎰)
[고려문과] 고종(高宗) 10년 (1223) 계미(癸未) 고종 10년 계미방(高宗 十年 癸未榜)
[인적사항] 본관 창녕(昌寧) [이력사항] 관직 : 우사간(右司諫)
《고려열조등과록(高麗列朝登科錄)》
장일(張鎰)
신증동국여지승람(조선 중종26년, 1531)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 경상도 慶尙道 [1] > 경주부 慶州府
상성군(商城郡) : 본래는 서형산군(西兄山郡)이었다. 동안군(東安郡) : 본래는 생서랑군(生西郞郡)이었다.
제영 사백년전장상가(四百年前將相家) : 고려 장일(張鎰)의 시에, "4백 년 동안 전 장상의 집, 다투어 누대(樓臺)를 지어 몇 번이나 웅장함을 자랑하였던고? 지금은 그 화려하던 것 누구에게 물으리. 들 살구 산 복숭아가 꽃이슬에 우네." 하였다.

〈창녕(昌寧)토착(土着)성씨(姓氏)고(考)〉
창녕문화원 1999년 12월 30일 발행(發行)
장일 창녕인 시조(始祖)
묘소(墓所) 창녕군 대지면 용소리 헌진산 계좌
매년(每年) 음력(陰曆) 10월 9일에 제향(祭享)하며 그 후손(後孫)은 고암면 윤상리(시치) 고암면 만촌등에 세거(世居) 설(設)에 의하면 하산군(夏山君)이 졸(卒)하고 나서 시신(屍身) 없어져서 상가(喪家)는 말할 것도 없고 조정(朝廷)에서 명(命)을내려 전국(全國)에 시신(屍身) 찾기에 나섰는데 3일이 되던날 경상도(慶尙道)땅 현재(現在) 묘소(墓所)지인 헌진산(獻津山)에서 발견(發見)되니 시신(屍身) 아래쪽에는 호랑이가 죽어 있었다고 한다. 시신(屍身)의 수습과 아울러 호랑이도 묻었다고 한다.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나 마을 대지면 용소리 헌터 사람들은“장정승 묘(墓)”라 칭(稱)하고 마을 수호신으로 매년(每年) 음력(陰曆) 1월 15일과 10월 15일 2회에 걸쳐 제사(祭祀)를 올리고 있다.

시조; 일(산소=대지면 용소리 헌진산), 2세(30대조 할아버지); 정하, 3세 태우, 4세; 하, 5세;제(문열, 문한, 문우),
6세;문열, 7세 호, 8세; 계근(구성, 영규), 9세; 구성(기, 윤, 희, 승부), 영규
10세; 기(세욱), 윤, 희(양준), 승부(용현)
11세; 세욱(태주), 양준(책), 용현(천년, 천서)
12세(32세손에서는 20대조 할아버지); 태주(의,관)
13세; 의(진,익);
관(경); ** 관=창산군파,
14세; 진(자연,자홍,자경), 익(이지) ** 익=부사공파.
15세; 자연(인동), 자홍(우성,중성,효성,신성) *** 우성=승지공파, 중성=전한공파, 효성=참봉공파, 자경(여성, 여해, 여필) *** 여필=맥계공파
16세(세조무렵); 우성(산소=부곡)(휘, 흔),
17세(15대 할아버지); 휘(산소=부곡)(령, 전, 화, 란, 지, 형, 운)
18세; 령(흥적), 전, 화(산소= 대합면 수장리)(대수, 순수), 란(산소=부곡)(흥렬, *흥세-산소는 창원 부북), 지(흥거,흥경),형(안세), 운
19세(중종~명종무렵); 순수(산소=간적 즉 시치) (승길; 생부는 흥세), 흥렬(신), 흥세(승록, 승길, 승복)
장순수(張順受: 1529-?) : 도승지공의 증손이다. 자(字)가 정숙(正叔)인데 뒤 에 이천(怡天)으로 고쳤으며, 호는 만은(晩隱)이다. 명종 11년(1556)에 문과에 올라 호조정랑(戶曹正郞), 산음현감(山陰縣監)을 지냈다. 당대의 명사 郭越(定庵), 郭황(走+黃: 濯淸軒), 宋鉉(宋希奎 子) 등과 교분이 있었다. 특히 공은 산음현감에 재직할 때, 그 고을로 낙향하여 학문을 열었던 남명(南冥) 조 식(曺植: 1501-1572) 선생에게 종유(從遊)한 것으로 추정된다.
20세(선조~인조); 승길(산소=부곡) - 관련문헌(文獻) ; 1. 창녕군지 효자편, 2. 창녕 금석문, 3. 영남 향햑자료집성
장승길(張承吉) ; 1574~1627 ; 임진왜란 전부터 시치에 거주하신 것으로 자료상 추정됨.
거(居) 창녕 고암 시치
창녕인 자(字)는 선유(善裕) 호(號)는 동암(東巖). 선조(宣祖) 7년 갑술(甲戌 1574) 1월 8일 생이며, 고려(高麗) 시중(侍中) 장일(張鎰)의 후손(後孫)이다. 천성(天性)이 돈독(敦篤)하며 효성(孝誠)이 지극(地極)하고 부모(父母)를 모시기에 항상(恒常) 부모님을 즐겁게 해 드렸다. 여묘(廬墓) 3년중(年中)에 몸이 노쇠(老衰)했으나 보리가루와 물만 먹으며 시묘(侍墓) 종제(終制)하였다. 광해군(光海君)때 음(蔭) 조산대부(朝散大夫)가 되고 인조(仁祖) 5년 정묘(丁卯 1627) 8월 8일 향년(享年) 62세에 졸(卒)하셨다.
창녕군 고암면 간상리에 있는 팔효각(八孝閣)에 배향(配享)되었다.
관(官) 조산대부(朝散大夫) 장승길(張承吉), 자(字) 선유(善裕) 거(居); 창녕 고암 시치, 조부(祖父): 장화(張華) 관(官) 참봉(參奉)
묘(墓); 창녕군 부곡면 부곡리
생부(生父) ; 흥세(興世) 관(官) 기자참봉(箕子參奉)
생모(生母) ; 용성송씨(龍城宋氏) 송천안(宋天安)의 녀(女)
양부(養父) ; 순수(順受) 자(字) 이천(怡天) 호(號) 만은(晩隱)
관(官) 문과(文科)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정랑(戶曹正郞) 행(行) 산청현감(山淸縣監)
양모(養母); 숙부인(淑夫人) 김해김씨(金海金氏) 습독(習讀) 김모(金某)의 녀(女)
배(配) ; 팔계정씨(八溪鄭氏) 정광조(鄭光祖)의 녀(女)
자(子); 지백(之白)
충신(忠信)스럽고 효성(孝誠)스러워 부모(父母)를 극진(極盡)히 모시고 기쁘게 해 드렸다. 병을 간호(看護)함을 옷을 벗는 일이 없고 잠도 자지 않았다. 학행(學行)이 성실(誠實)하여 세칭 고행처사(高行處士)라 했다.
녀(女); 신성유(辛聖유) 1600 ~ 1644 와 혼인.
영산人 상장군공파 19세손. 수(壽) 45세
15세 종모당(終慕堂) 주(柱)의 현손(玄孫)이다.
18세 생부(生父) 문암(聞巖) 초(礎)이고, 18세 양부(養父) 사천(泗川) 압(石+甲)의 계자(系子)이다. 자(字)는 여적(女積), 선조(宣祖) 33년 경자(庚子 1600) 10월 7일 생이다. 인조(仁祖) 12월 갑술(甲戌 1634)에 무과(武科)에 올라 통훈대부 행 군기사 주부(通訓大夫 行 軍器寺 主簿) 대구중군(大邱中軍)을 역임(歷任) 하였으며, 인조(仁祖) 22년 갑신(甲申 1644) 7월 17일 졸(卒) 했다.
형제(兄弟)
기타(其他); 조부(祖父): 장화(張華) 관(官) 참봉(參奉)

* 위에 언급된 신압 장군에 대한 내용은 전술한 바이다.


(작성자) 장덕진;
1) 본적; 경남 창녕군 고암면 간상리 636
2) 직업, 직위; 의사, 의학박사, 개인의원 원장, 현 대구광역시 의사회 정책이사
3) 연락처;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3동 2567-8 그린필 의원.
011-824-7192, ,053-623-6686, E-mail; djjy2000@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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