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군 대지면 용소로 시조묘소 관련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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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4-08-30 10:32 조회 2,114회 댓글 0건본문
# 시조 장간공 할아버지에 관련된 글 일부.
장간공은 고려 3태사의 한분이신 장정필(안동장씨의 시조)의 6세손인 장일(張鎰)입니다.
이력(履歷) ; 창녕군(인물)
장일(張鎰) , 장민(張敏)
창녕인 1207 (희종 3)~ 1276 (충령왕 2). 고려(高麗)~충렬왕때의 명신(名臣)이며 초명(初名)은 민(敏)이요 자(字)는 이지(弛之)이요 본관(本貫)은 창녕(昌寧)=하산(夏山)이다. 고종(高宗)때 급제(及第)하여 고종(高宗) 1년에 승평관(昇平官)을 지내고 원종때 예부시랑(禮部侍郞),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이르다.성품(性品)이 온순(溫純) 공경(恭敬)하고 정직(正直)했으며 글을 잘했고 관리(官吏)의 재목(材木)으로 뛰어 났었다. 경상도(慶尙道) 수로방호사(水路防護使)로서 난(亂)을 진압(鎭壓)하였고 뒤에 사신(史臣)으로 원(元)나라에 자주 왕래(往來)했으며 원종(元宗) 15년(1274)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고 충렬왕 즉위때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가 더해졌다.
하산군(夏山君)에 봉(封)해지고 익호(謚號)는 장간(章簡)이다.
장일(張鎰)
[고려문과] 고종(高宗) 10년 (1223) 계미(癸未) 고종 10년 계미방(高宗 十年 癸未榜)
[인적사항] 본관 창녕(昌寧) [이력사항] 관직 : 우사간(右司諫)
《고려열조등과록(高麗列朝登科錄)》
장일(張鎰)
신증동국여지승람(조선 중종26년, 1531)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 경상도 慶尙道 [1] > 경주부 慶州府
상성군(商城郡) : 본래는 서형산군(西兄山郡)이었다. 동안군(東安郡) : 본래는 생서랑군(生西郞郡)이었다.
제영 사백년전장상가(四百年前將相家) : 고려 장일(張鎰)의 시에, "4백 년 동안 전 장상의 집, 다투어 누대(樓臺)를 지어 몇 번이나 웅장함을 자랑하였던고? 지금은 그 화려하던 것 누구에게 물으리. 들 살구 산 복숭아가 꽃이슬에 우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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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昌寧)토착(土着)성씨(姓氏)고(考)〉
창녕문화원 1999년 12월 30일 발행(發行)
장일 창녕인 시조(始祖)
묘소(墓所) 창녕군 대지면 용소리 헌진산 계좌
매년(每年) 음력(陰曆) 10월 9일에 제향(祭享)하며 그 후손(後孫)은 고암면 간상리(시치) 고암면 만촌 등에 세거(世居) 설(設)에 의하면 하산군(夏山君)이 졸(卒)하고 나서 시신(屍身) 없어져서 상가(喪家)는 말할 것도 없고 조정(朝廷)에서 명(命)을내려 전국(全國)에 시신(屍身) 찾기에 나섰는데 3일이 되던날 경상도(慶尙道)땅 현재(現在) 묘소(墓所)지인 헌진산(獻津山)에서 발견(發見)되니 시신(屍身) 아래쪽에는 호랑이가 죽어 있었다고 한다. 시신(屍身)의 수습과 아울러 호랑이도 묻었다고 한다.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나 마을 대지면 용소리 헌터 사람들은“장정승 묘(墓)”라 칭(稱)하고 마을 수호신으로 매년(每年) 음력(陰曆) 1월 15일과 10월 15일 2회에 걸쳐 제사(祭祀)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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