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군 고암면 간상리 간적(시치마을) 유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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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4-08-30 09:56 조회 2,191회 댓글 1건본문
간상리 간적(시치)마을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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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적 골짜기에는 3개의 마을이 있다. 창녕말로써 안담(웃마), 중마, 아랫마 등으로 불리는데, 예로부터 시치라고 하면 웃마를 일컫는데 근래 들어와서는 중마와 아랫마도 시치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각종 문헌상으로 고찰하건데, 시치는 임진왜란 전부터 사람이 거주한 것으로 판단되며, 구전에 의하면 고려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이유는 시치에는 골짜기가 2곳이 있는데 현재의 간적 소류지(저수지)옆의 산밭골이라는 조그만 골짜기가와 현재 창녕장씨의 재실이 있는 골짜기 2곳이다. 장씨가 터전을 잡기 전에 시치의 안쪽 산밭골에는 김씨들이 누대에 걸쳐 거주 하였으며, 일제시대 까지만 해도 산밭골에는 수가구가 거주하였으며, 현재는 모두 없어지고 밭으로 사용 중이며, 간혹 기와조각이나 도자기 조각 등이 발견되어 오래전부터 거주지였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지금도 김씨 문중의 선산이 산밭골 위에 위치하여 묘사 등 사람의 왕래가 있다.
시치가 고려시대부터 사람의 거주지였다는 또다른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시치라는 말이 고려시대에 지어졌다는 사실이다. ‘시’는 시냇물 즉 澗(산골물 간)의 몽고말이며 ‘치’는 赤(붉을 적)의 몽고 말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려시대부터 거주지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몽고인들의 영향력이 있던 고려중기 이후부터 김씨들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그 이후 장씨들이 입향하여 인접한 골짜기에 집성촌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의 유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래로 당산나무는 마을의 동남쪽에 입구에 위치하여 그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의 역할을 해왔으므로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이후 조선시대에 시치는 간적(澗赤)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또다른 이론은 임진왜란때에 인접한 대산성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로 인하여 시내물이 붉게 물들었다 해서 간적으로 명명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일제시대부터 지명 개편 시에 과거의 역사를 지우려고 간상리라는 지명으로 개칭했다는 동네 원로의 구전도 있다.
현재 시치에는 창녕 장씨가 주축이 되어 마을을 형성하고 있으며 오래된 선산과 각종 비석, 재실이 있으나 여타 마을처럼 거주자가 해마다 감소하는 추세이다.
댓글목록
장정희님의 댓글
장정희 작성일그런 유래가 있었던것 60년이 넘어서야 알게된것, 조상님 탓도 있는것 같아..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