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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299통의 비밀편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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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형근 작성일 18-11-05 09:55 조회 1,62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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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299통 비밀편지 역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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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자식' '주둥아리' 거친말 마구 하는 정치 9단

비밀 편지로 드러난 '인간 정조'의 모습은


 

9일 공개된 정조가 노론 벽파(僻派)의 영수 심환지(沈煥之·1730~1802)에게 보낸 어찰첩(御札帖)의 내용을 보면 '인간 정조'는 알려진 바와 다르게 매우 격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지금까지 정조를 소재로 한 TV 드라마나 소설에서는 항상 인자한 '성군'(聖君)으로 '악인(惡人)' 심환지와 대립하다가 결국에는 독살 당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최근 발굴된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편지 299통은 이런 통념을 뿌리부터 흔든다. 노회한 정치가는 정조 자신이었으며, 더구나 분을 쉽사리 참지 못하고 생각나는 대로 말을 내뱉는 다혈질의 군주였다.

 

 ● 격정의 군주

동아시아 제왕학에서 군주는 자고로 말이 적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조는 정반대였다. 말이 많은 다변(多辯)의 군주였다. 이는 격정적이고 화를 참지 못 하는 성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 비밀 편지에서 보이는 신하들에 대한 가감 없는 평가가 그런 성격을 증언한다.

예컨대 정조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서영보(徐龍輔·1757~1824)에 대해서는 "호로자식"(胡種子)이라 하는가 하면,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학자 김매순(金邁淳)은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이자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놈이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린다"고 혹평했다.

나아가 황인기(黃仁紀)와 김이수(金履秀)라는 신하에 대해서는 "과연 어떤 놈들이기에 감히 주둥아리를 놀리는가!"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의 편지에는 '호로자식' '주둥아리' 등 비속어가 자주 노출되며 심지어 한문 편지 중간에 난데없이 한글이 튀어나기도 했다. 1797년 4월 11일에 보낸 편지 한 구절에서 발견되는 '뒤죽박죽'이 그 대표적인 예다.

"요사이 벽파(僻派)가 (인사에서) 탈락한다는 소문이 자못 성행한다고 하는데… 그 이해득실은 어떠한가? 지금처럼 벽파의 무리가 '뒤죽박죽'이 되었을 때에는 종종 이처럼 근거 없는 소문이 있다 해도 무방하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정조 자신도 성품이 유별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1799년 11월24일 아침에 보낸 편지에는 "간밤에 잘 있었는가? 나는 요사이 놈들이 한 짓에 화가 나서 밤에 이 편지를 쓰느라 거의 5경(새벽 3~5시)이 지났다. 내 성품도 별나다고 하겠으니 우스운 일"이라고 쓰기도 했다.

 

● 신하와 짜고 한 정치

정조실록에 나타난 정조는 진실한 선비의 전형이라기보다는 국왕 지지 세력조차도 당혹스러워 할 정도로 기만적인 정치를 했으며 이번 비밀편지에서 이런 면모가 그대로 드러난다.

 

정조는 반대 세력인 심환지와 은밀한 방법으로 서찰을 교환하며 당대 인사들의 동향을 파악했으며, 특히 심환지를 통해 노론 벽파계 인물들을 통제하려 했고, 주요인사 문제를 협의하고 국정운영에 필요한 조치들을 취했다.

이 과정에서 정조는 심환지와 각본에 의한 인사를 단행하기도 했다. 심환지를 예조판서와 우의정에 임명한 과정이 이에 해당한다. 정조실록에 의하면 1798년(정조 22) 7월14일에 심환지를 예조판서에 임명하고, 한 달이 지난 8월28일에 곧바로 우의정에 승진 발령했다. 하지만 어떤 과정을 거쳐 심환지가 이렇게 등용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번 어찰을 보면 이런 인사조치가 있기까지 정조와 심환지는 수많은 비밀편지를 교환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마디로 '내가 언제 너를 예조판서, 혹은 우의정에 임명할 터이니 너는 이렇게 준비하고 행동하라'는 지침을 사전에 내린 것이다.

나아가 정조실록에는 심환지가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여러 번 사직상소를 올린 것으로 나온다. 한데 이번 비밀 어찰을 통해 이 또한 정조와 심환지가 미리 각본을 짜고 벌인 일종의 '정치 쇼'였음이 드러난다.

정조는 1798년 9월18일, 금강산 유람에서 돌아온 심환지에게 첫 번째 사직상소를 언제 낼 것인지를 물었으며, 그에 대한 답변과 사직상소 문안이 도착하자 "사흘 후(9월24일)에 내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하고 직접 사직상소 문안까지 손 본 것으로 밝혀졌다.

이 편지들 중 하나에는 심지어 "내일 어전 회의에서 이런 사안을 논의할 터이니, 심환지 당신이 이런저런 의견을 내 놓으면 내가 승인하겠다"고 미리 입을 맞추는 내용도 있다.

 

● 정조 독살설의 진실은…

1800년(정조 24) 1월17일,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모신 화성 현륭원(顯隆園)을 찾았다. 그 자신에게는 마지막 현륭원 방문인 이날 정조는 아버지 무덤을 둘러보다가 설움이 북받쳐 바닥에 엎드려 땅을 치면서 통곡했다.

신하들이 당황해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두 사람이 정조 좌우를 부축해 일으켰다. 한 사람이 좌의정 심환지였고 다른 사람은 우의정 이시수(李時秀)였다.

 

심환지는 이 당시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下敎)를 하십니까? 마음을 졸이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신들에 대해서는 말할 겨를도 없지만, 오르내리시는 영혼께 걱정을 끼쳐 드림은 생각지 않으십니까?"라며 함께 통곡했다고 실록은 전한다.

정조의 하교는 자신의 죽음 뒤에 해야 할 일을 담았다. 이로 보아 정조는 이 무렵에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직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부터 5개월 정도 지난 1800년 6월28일 정조는 타계했다.

이 날짜 정조실록을 보면 정조는 새로 승지에 임명한 김조순(金祖淳) 등을 접견하다가 병세가 위중해졌고, 심환지가 다시 만났을 때는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다급해진 심환지가 정조의 입에다가 성향정기산(星香正氣散·한약의 일종), 인삼차, 청심환(淸心元)을 넣어주려 했지만 정조는 전혀 삼키지를 못하고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심환지는 정조와 정치적 이해관계를 달리한 노론 벽파의 우두머리였고, 나아가 정조가 죽을 때 그 옆에서 약을 들도록 했다는 이 기록에 주목해 심환지가 정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하지만 이번에 공개된 비밀 편지를 보면 정조와 심환지가 긴밀한 협력 관계로 보아 심환지가 정적이라기보다는 심복이었음을 입증한다.

독살설도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정조의 편지는 정조가 말년에 각종 질병으로 고생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익히 알려진 대로 정조는 이미 말년이 되면 돋보기 안경을 쓰고도 글을 읽지 못할 정도였으며, 곽란이나 다른 병으로 며칠 동안 앓아눕는 일이 더러 있었다. 죽기 두 달 전인 4월 17일자 편지에는 이렇게 호소했다.

"나는 갑자기 눈꼽이 불어나고 머리가 부어오르며 목과 폐가 메마르네. 눈꼽이 짓무르지 않을 때 연달아 차가운 약을 먹으면 짓무를 기미가 일단 사라진다. (중략)번갈아 (온몸이) 통증을 일으키니, 그 고통을 어찌 형언하겠는가?"

사망 13일 전에 쓴 편지는 더욱 악화한 병증을 호소한다. "나는 뱃속의 화기(火氣)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는 않는다. 여름 들어서는 더욱 심해져 그 동안 차가운 약제를 몇 첩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 앉는 자리 옆에 항상 약 바구니를 두고 내키는 대로 달여 먹는다. 어제는 사람들이 모두 알아차렸기에 어쩔 수 없이 체모(體貌)를 세우고자 탕제를 내오라는 탑교(榻敎)를 써 주었다" 병은 이미 회복 불가능한 단계로 독살은 가능성이 희박했다.

 

<심환지는 누구?>

심환지(沈煥之;-1730 ~ 1802),자 휘원,호 만포,시호 문충,본관 청송.

1771년 정시문과에급제, 교리등을 역임하고,1787년(정조11)호서암행어사가 되었다. 그 후 대사간. 대사성을 역임, 1792년 형조참판으로 평택안핵어사 김희채의 탄핵으로 금갑도에 위리안치, 이 해 풀려나와 이듬해 이조참판에 복직, 이어 대사성으로 비변사 조제를 겸직. 그 후 예문관 제학.능주 목사.양관제학.이조판서 등을 거쳐 1795년 우의정, 이듬해 판중추부사. 좌의정,이어 우참찬 등을 역임하고 1800년(순조 즉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으로 벽파가 득세하게 되자 영의정에 올라 이듬해 신유박해 때 시파의 천주교인에게 박해를 가했다.

영조 말에 영조비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구주와 같은 벽파로서 반대당인 시파 홍국영에 대한 공격에 선봉으로 활약했으며 사후에 1806년(순조 6)관작이 추탈되었다가 1864년(고종 1)신원되었다.

 

 

다음은 정조가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 편지 

 

 

叔母主前

 

상풍의

긔후 평안오

신 문안 아고져

라오며 뵈완 디 오

래오니 섭〃 그립

와 다니 어

제 봉셔 보고

든〃 반갑와

오며

한아바님겨오셔도

평안오시다 

온니 깃브와 다           

 元孫

 

숙모님께

을바람에 기후(氣候) 평안(平安)하시온지, (숙모님의) 문안(問安) 알기를 바라옵니다. (숙모님을) 뵌 지가 오래되어 섭섭하고 그리웠는데, 어제 (숙모님께서 보내신) 편지를 보고 (나니) 든든하고 반갑사오며, 할아버님께서도 평안(平安)하시다고 하니 기쁘옵니다.

원손(元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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