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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경기 작성일 20-08-02 11:13 조회 1,692회 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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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극장] 인정받지 못한 독립유공자 장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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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장재성(왼쪽). 1943년 찍은 가족사진. 장재성 옆에 부인 박옥희와 큰아들 장상백(11개월). 장재성기념사업회

1962년 3·1절 일간지에 이채로운 기사가 실렸다. 독립운동유공자 서훈을 받기로 예정된 한 인물의 자격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는 뉴스였다.

“내각 사무처에 설치되어 있는 독립운동유공자심사위원회는 (1962년 2월)28일 하오 제3차 회의를 열고 수훈 대상자를 다시 검토한 끝에, 단장을 받게 된 장재성씨에 대한 수훈을 취소키로 결의하였다. 알려진 바로는 장씨에 대한 취소는 공산당에 관련한 혐의 때문이라고 한다. 이로써 건국공로훈장 수훈자의 총수는 205명으로 줄어들었다.”1

1962년 첫 독립유공자 서훈심사에서 탈락

문제의 인물은 장재성(張載性)이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지도자로 손꼽히는 이였다. 그에겐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을 수여할 예정이었다. 단장은 포상 등급을 가리키는 용어로, 1등 중장(重章), 2등 복장(複章)에 뒤이어 3등 훈장을 뜻했다.

해방 뒤 처음 시행하는 독립유공자 서훈이었다. 일제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 17년이 지난 뒤에야 겨우 실행에 옮겨졌음에 눈길이 간다. 공동체의 규범과 정의를 세우는 일이 이처럼 지체됐다는 사실이 놀랍다. 정부 수립 이후 역대 정권이 정체성 확립과 관련해 얼마나 무신경하고 무능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962년 독립유공자 서훈 제도에는 정치공학적 책략이 숨어 있었다. 5·16 쿠데타가 벌어진 이듬해였음에 주목하자. 자신의 취약한 적법성과 정통성을 보완하려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 애국선열 포상, 유공자 후손에 대한 원호, 민족문화 보존 등의 정책은 식민지에서 벗어난 독립국의 공동체적 가치를 선양하는 효과가 있다. 박정희 정권은 그를 노렸다. 집권 뒤 첫 3·1절을 이미지 개선에 활용하려 했다. 민족적 규범과 가치를 수호하는 공공성의 대표자라는 이미지를 갖고 싶었던 것이다. 온몸에 뒤집어쓴 오물을 가리려고 비단옷을 갖춰 입은 셈이다.

왜 서훈을 취소했는가? 서훈 결정을 번복한 까닭은, 신문 보도에 따르면 ‘공산당에 관련된 혐의’ 때문이었다. 상훈심의위원회에서는 ‘6개 제외 규정’을 운용했다. 독립유공자라 하더라도 서훈하지 않는 경우를 명시했던 것이다. 이 중 반공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게 3개항이었다. ‘국시 위배’ ‘납북’ ‘해방 후 월남하지 않은 자’ 등의 항목이다. 설령 독립운동에 큰 공로가 있더라도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에 공감한 경우 유공자 서훈을 하지 않겠다는 지침이었다. 장재성은 이 내부 지침의 희생양이 되었다.

광주고보 5학년 때 사회과학 연구모임 결성

장재성이 처음 비밀결사에 가담한 것은 그가 19살 때 일이었다. 광주고등보통학교 5학년이던 1926년 11월3일이었다.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학생 16명이 ‘성진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깰 성(醒), 나아갈 진(進)이라는 모임 이름은 세계에 대한 사회과학적 인식을 지침 삼아 함께 전진하자는 뜻을 담았다. 사회과학 연구모임이었다.

22살 때 장재성의 비밀결사 관련성은 더욱 심화했다. 광주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주오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던 그가, 1929년 6월 귀국했다. 전업으로 비밀결사운동에 뛰어들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그새 사회과학 비밀모임은 광주 각급 중등학교로 퍼졌다. 앞에 언급한 두 학교에 더해 광주사범학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도 ‘독서회’ 또는 ‘소녀회’라는 이름의 사회과학 연구모임이 움직였다. 장재성은 이 비밀단체들을 규합했다. 그리하여 학교별 독서회를 지휘하는 ‘독서회중앙부’를 결성하고 책임비서 직위에 올랐다.
광주고보 독서회 사례를 들여다보자. 구성원은 17명인데, 5개 반으로 나눠 반별로 독서모임을 열었다. 즐겨 읽은 책은 <공산당선언> <자본론> 같은 마르크스 저작, <사회주의 대의> <무산자정치교정> 등의 해설서, <노동자전> <학생과 정치> 등과 같은 참고서였다.

이들은 그해 6월 하순 무등산 중머리재에서 회합했다. 참가자 최성원의 기억에 따르면, 장재성이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적인 발언을 했다. ‘우리가 저들의 쇠사슬에 묶여 영원히 노예 노릇을 할 것인가, 아니면 멍에를 벗어던지고 자유인이 될 것인가? 이는 우리 스스로가 결정지을 일이지 남의 자비심에 의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날 독서회 학생들은 점심을 먹고 난 뒤 평탄하고 광활한 중머리재를 누비며, 난생처음 혁명가를 부르면서 시위행진 연습을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그랬다고 한다. 그때 예행연습이 없었더라면 11월3일의 대시위가 과연 이루어졌을까? 아마 <학도가> 따위의 창가나 부르면서 거리행진을 하다 경찰에 손쉽게 해산당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장재성은 활동 영역을 비밀결사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그는 합법 영역의 공개적인 사회운동도 중시했다. 1929년 광주 출신 국내외 유학생들을 규합해 ‘광주유학생회’를 조직하고 간부로 취임했다. 또 같은 해에 조선청년총동맹 전남도연맹에도 참가했다. 1929년 9월 광주에서 열린 도연맹 제2회 대회에 참석해 집행위원 21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됐다. 그의 활동상은 다각적이지만, 외연이 일정한 범위 안에 있음이 눈에 띈다. 바로 광주 일원의 학생운동과 청년운동이었다. 그는 합법과 비합법의 양 공간에 걸쳐 광주의 청년·학생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장재성과 그 동료들이 개척한 합법 영역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소비조합운동이었다. 학생들 왕래가 잦은 북성정(北城町) 네거리, 오늘날 금남로4가역 교차로 금남로공원 중앙로변에 위치한 일본식 2층 목조가옥을 임대했다. 그곳에 문구점과 빵가게를 열기 위해서였다. 빵가게 이름이 이채롭다. ‘장재성빵집’이었다. 당시 학생들이 즐겨 찾던 호떡을 만들어 파는 가게였다. 다다미 18장이 깔린 널찍한 2층 공간이 유용했다. 비밀모임이나 은밀한 작업 공간으로 안성맞춤이었다. 그곳을 압수수색한 일본 경찰의 보고서에 따르면, 넓은 공간 한가운데에 회의용 탁자가 덩그러니 놓였다고 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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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찰이 그린 독서회중앙본부의 합법 소비조합 건물. ‘장재성빵집’과 문방구. 1층에 두 개의 가게를 열었고, 다다미 18장이 깔린 2층은 비밀모임과 인쇄 작업을 위한 공간으로 썼다. 장재성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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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장씨대종회님의 댓글

profile_image 창녕장씨대종회 작성일

창녕장씨의 소중한 역사를 널리 알리고 기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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