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태사묘(安東 太師廟)태사묘(太師廟) | 문화유적답사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형근 작성일 20-07-23 20:42 조회 1,509회 댓글 1건본문
안동 태사묘(安東 太師廟)태사묘(太師廟) | 문화유적답사
태사묘(太師廟)
태사묘(太師廟) 태사묘(太師廟) 김태사신위(金太師廟神位) 태사묘(太師廟)동제에서 김태사묘비명(金太師廟碑銘)
권태사묘비명(權太師廟碑銘)
장태사묘비명(張太師廟碑銘 )삼공신비 ( 三功臣碑 )
6. 태사묘(太師廟)
안동 태사묘(安東 太師廟)는 안동시 북문동에 있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김선평, 권행, 장정필 3명의 태사(太師)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1974년 경상북도의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다.
1540년(중종 35년) 안동부사 김광철(金光轍)이 현위치에 사묘를 건립하였다. 1556년 안동부사로 부임한 권소는 권씨 성을 가진 수석 호장(戶長)에게 관리를 맡겨 매년 제사를 받들게 하는 등 제도화에 힘썼다.
1950년 6·25전쟁 때 전소된 것을 그 후 복원하였다.
부속건물은 보물각과 숭보당, 동·서재, 경모루(敬慕樓), 안묘당, 차전각 등이 있다. 정문 경모루로 누각건물인데, 이곳을 들어서면 전면에 숭보당(강당)이 있고,좌우로 동·서재가 있으며, 그 뒤쪽으로 태사묘(사당)가 있다. 보물각에는 보물 제451호로 지정된 삼태사(三太師)의 유물 12종 22점이 보관되어 있다. 뜰에는 삼공신비(三功臣碑)가 세워져 있다.
병산전투와 삼태사 후삼국 시대 고창군에서 경순왕 4년(930년)에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이다. 그 해 930년12월 후백제국은 교통의 요충지 고창으로 몰려들었고 이에 왕건은 그 곳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왕건이 고창에 오자 고창 호족 김선평, 권행, 장정필 등은 성민들을 이끌고 왕건에게 투항하였다. 김선평, 권행, 장정필 등은 군대와 식량을 대주었고 고려군은 먼저 후백제군의 식량 보급대를 공격해 보급로를 끊었고 왕건은 대군을 이끌고 고창 병산으로 진격해 3-4일 간의 접전 끝에 고창지역의 지방 호족들의 지지를 얻은 고려군이 후백제군을 대패시켰다.
이 전투로 인해 죽은 후백제 군사의 수가 8000명에 달했고 이 전투에서 고려가 엄청난 승리를 함으로써 후삼국을 통일 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였다. 이후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싸움에서 입장이 불분명했던 안동, 청송 일대의 30여 고을이 잇따라 고려에 귀부하였으며,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시켰다. 아울러 후백제는 더 이상 경상도에서 대세를 상실하고 이 후 충청도에서도 이북의 30여 성이 고려에 귀부(스스로 와서 복종함)하게 되어 전라도 일원만 유지하게 되었다.
병산전투에서 공을 세운 김선평, 권행, 장정필 이 세 사람을 삼태사라고 한다. 여기서 태사는 정1품 명예직을 뜻한다. 조선 광해군 때에 세 성씨의 대표 김태, 권함, 장흥효가 합의하여 위패를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으로 하여 제주하여 권오가 써서 나란히 모시고 있다. 여기서 삼한벽상은 940년 신흥사를 중건할 때 공신당의 동서 벽에 초상이 그려진 공신을 말하고, 삼중대광은 정1품의 품계를 뜻하며, 아부공신은 국부의 버금가는 공신 벼슬을 뜻한다.
김선평은 신라 효공왕 5년 흥덕궁에서 태어났다. 춘추 26세에 고창의 성주가 되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지리상 중요한 성에 26세의 젊은 성주였다면 필시 진골이었을 것이니 효공왕의 왕자로 추정된다. 김선평은 권행, 장정필과 함께 고창에서 견훤을 크게 물리쳤고 이에 왕건은 병산전투에서 크게 공을 세운 김선평에게 대광(정1품 품계)의 벼슬을 내렸다. 현재 김선평의 묘는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에 위치하고 있다.
권행은 원래 신라의 종성으로 왕실 성씨인 경주김씨이다. 견훤이 신라 경애왕을 자살하게 한 데 대해 분개하던 중 태조 왕건을 도와 고창에서 견훤을 크게 물리쳤다. 일명 병산전투에서 김행의 공을 크게 여긴 왕건은 김행에게 수훈이 크다 하여, 능병기달권 즉, “기미에 밝고 정세를 밝게 판단해 권도에 통달했다”라고 하며 권씨 성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왕건은 이후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하고, 고창군 별장이었던 권행에게 안동부를 식읍으로 주었다. 또한 왕건은 권행에게 장정필과 함께 대상(고려 초기에 둔 16등급 가운데 일곱째 품계)의 벼슬을 내렸다. 현재 권행의 묘는 안동 서후면 성곡동 천등산에 위치하고 있다.
장길은 자는 영보, 호는 포음, 시호는 충헌이다. 나중에 정필(貞弼)로 개명하였다. 장길은 장보고 장군의 현손이다. 장보고 장군의 증손이자 장정필의 아버지인 장원은 대사마대장군으로 당의 절강성 소흥부에 거주하면서, 그곳에서 아들 장길을 얻었다. 당나라가 혼란해지자 장원은 5살인 장정필을 데리고 강원도 강릉으로 이주하였다. 장길이 18세 때 정조사(정월 초하룻날 새해를 축하하러 중국에 가던 사신)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 24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 하였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입산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명성이 천자에까지 알려져, 한때 벼슬이 이부상서에까지 올랐으나, 벼슬을 버리고 우리나라에 다시 들어와 경북 인동의 노전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고 한다. 장정필은 서기 930년 고창 성주인 김선평, 판관(외직무관으로 5품에서 6품) 김행과 함께 태조 왕건을 도와 후백제 견훤의 군대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워, 삼한벽상에 책록되고 삼중대광으로 아부공신에 녹권되어 태사 및 영운사에 오르고 대상(고려 초기에 둔 16등급 가운데 일곱째 품계)의 벼슬을 받았으며 안동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안동으로 하였다. 현재 장정필의 묘는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에 위치하고 있다.
숭보당은 삼태사의 후예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중요한 회합을 갖는 공간이다. 전통시대에는 태사묘는 안동 부민이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었으며 숭보당은 지역 사림이 모여 문중과 학맥과 당파를 초월하여 향회를 열고 민의를 결정하는 공론의 장이었다. 국난이 있을 때 창의를 하거나 출병을 할 때에도 삼태사묘에 고하였으며 학봉을 모신 임천서원을 세우기 위한 향중의 모임도 이곳에서 했다는 기록이 있다.
보물각은 고려시대에 삼태사가 사용했다고 말해지는 붉은 칠잔 1개, 백옥대, 금대, 여지금대, 오서대, 옥관자 2개, 동인 2개, 갖신 1쌍, 비단 2폭, 공민왕의 친필교지 1점 등이 보존되어 있다. 원래 옥피리와 상아홀 등 많은 유물이 있었으나 6.25때 유실되었다 한다.
안묘당 두 개의 방으로된 이 건물은 하나는 첨지[3] 안금이의 사당이고 하나는 주모였던 노파 안중구를 제사하기 위한 것이다. 사당의 처마에는 이 두 사람을 제향하게 된 연유를 기록한 현판이 있다. 이에 의하면 안노파는 술을 잘 빚기로 이름난 주모였는데 신라말 견훤의 군대가 병산에 진을 치고 고창성을 죄고 있는 판국에 그녀가 고삼을 넣어서 만들 술을 견훤의 진중에 선물하였다. 그 술은 아주 맛이 있어서 병사들이 독한 줄도 모르고 신나게 마셨으므로 모두 취해 곯아 떨어졌다. 안노파는 급히 성주에게 연락을 하였고 성주의 지휘하에 민병은 견훤 군대를 궤멸시키다시피 격퇴하였다. 후손들은 이를 기려서 안노파를 안묘에 봉향하여 오늘에 이른다. 안금이는 태사묘를 지키는 노복이었는데 임진왜란이 나서 모두 피신하자 삼태사의 위패를 수습하여 길안의 깊은 골짜기인 국란이란 동네의 한 동굴 속에 숨어서 삼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올리며 지켜왔다. 난이 끝나고 그의 갸륵한 행적에 향중의 인사들이 부끄러워하는 한편 감격하여 이를 부사를 통하여 나라에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면천을 시켜주었고 향중에서는 어떤 소원이든지 들어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하던 일을 하고 죽으면 영혼이라도 남아서 삼태사가 남긴 밥과 술이나 얻어먹을 수 있다면서 죽어서도 영원히 삼태사와 함께 살게 해달라고 소원하였다. 그는 양인으로 신분이 바뀌고 첨지라는 칭호를 받았고 죽은 후에 향중에서는 작은 사당을 지어 그의 위패를 봉인하였다.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삼태사를 모시고 향사가 있는 날에는 삼태사의 자손들로부터 제사를 받게 되었다.
고창전투 고려와 후백제의 정면 국경선이라 할 충청도의 중부선에서는 비교적 큰 변동이 없었던 데 비해, 신라의 세력권인 경상도 안동으로부터 상주를 거쳐 합천․진주에 이르는 낙동강 서부 일대에서는 혼전을 벌였다. 이들 지역은 아직 신라의 세력권이기는 하나 신라 정부의 쇠약으로 거의 독립적인 상태였다. 따라서, 각 군현을 쳐서 점령하는 것이 쉬웠고 그 외곽일대는 양국의 전선이 되었다. 이것은 바로 고려의 남진정책과 후백제의 동진정책의 충돌이었다.
공산전투 직후 후백제는 고려의 경상도 진출경로를 차단하기 노력하였다. 후백제는 경상북도 서부지역 즉 소백산맥 以東지역을 공략하여 고려의 천안-청주-보은-옥천으로 이어지는 추풍령로와 광주-이천-음성-문경으로 이어지는 조령 및 이와 인접한 계립령로마저 차단하였다. 결국 고려는 경상도진출을 위해 동쪽으로 훨씬 우회하는 죽령로를 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929(태조12)년 7월 견훤은 갑병(甲兵) 5천여 명을 거느리고 의성부를 공격하여 왕건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성주 홍술을 전사시켰다. 견훤은 공격을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고창군(안동)으로 밀려들었다. 그 해 12월, 후백제군에 의해 포위된 고창지역을 구원하기 위해 고려군은 죽령을 넘어 풍기와 영주를 거쳐 봉화방면으로 진행하여 예안진(禮安津)에 이르렀다.
고창전투의 출발은 유금필이 이끄는 고려의 선봉군이 안동시 와룡면 서지동의 서남쪽에 위치한 저수봉에 도착하여 후백제군을 격파함으로서 비롯되는데, 이후 병산(甁山)과 합전교(合戰橋)에서 결전을 치른다.
930년 1월 21일부터 1월 25일, 3~4일정도의 짧은 기간에 8천여 명의 전사자를 내었다는 사실은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였는지를 알려 준다. 병산전투의 진행양상을 알려 주는 ‘진모래전설’을 소개한다.
견훤은 원래 지렁이의 화신이었다고 하는데, 전시(戰時)에는 모래땅에 진을 쳐 신변이 위태롭게 되면 모래 속으로 들어가 웬만해선 그를 물리칠 수 없었다고 한다. 삼태사(三太師)가 현재의 안동군 와룡면 서지동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견훤은 그 동쪽 낙동강변 모래땅에 진을 쳐 대전하였는데, 싸움이 수십번 계속되어도 끝이 나지 않고 견훤은 싸우다가 불리해지면 모래속으로 들어가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삼태사 군사들은 전략을 세워 흐르는 강을 막아 못을 만들어 물 속에 소금을 수없이 넣어 염수(鹽水)를 만들어 놓고 접전을 했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치열한 싸움이었다. 견훤은 싸움이 점점 불리해지자 당황하여 지렁이로 둔갑해서 모래 속으로 기어들었다. 삼태사군(軍)은 이때다 하여 염수의 못물을 터뜨렸다. 소금물이 흘러내리니 아무리 둔갑한 지렁이일지라도 견딜 재주가 없었다. 견훤은 겨우 목숨만 건져 패주하여 안동 땅에서 물러갔다고 한다. 지금도 이 내를 소금물이 흘러갔다고 하여 간수내(가수내)라 부르고 견훤이 숨은 모래를 진모래(진몰개, 긴모래)라고 한다. 지금은 안동댐 수몰로 모래를 볼 수 없다.(『경상북도 지명유래총람』63쪽)
차전각은 삼태사가 견훤의 군대를 격파하고 승전의 잔치에서 비롯된 남성들의 대동놀이인 차전놀이(동채싸움)가 전승 보전되고 있다 락민카페에서 퍼옴 |
댓글목록
창녕장씨대종회님의 댓글
창녕장씨대종회 작성일장형근님의 소중한 자료에 감사드립니다. 뜻깊은 방문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