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씨들(인터넷에 있는 내용)-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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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수빈 작성일 04-11-22 00:00 조회 1,426회 댓글 0건본문
[결성장씨〕 시조는 고려 충렬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결성부원군 장사이다. 확고하게 씨족세를 굳힌 인물은 그의 현손인 청계공(淸溪公) 장하(張夏)이다. 유명한 인물로는 항일순절자 장재학(張在學), 광복 후 한국민주당 정치부장을 지낸 장덕수(張德秀) 등을 들 수 있다.
〔구례(求禮)장씨〕 봉성(구례의 옛 이름)장씨라고도 한다. 시조는 고려 때 시중(侍中)을 지낸 양간공(襄簡公) 장악(張岳)인데, 일설에는 고려 때 상서(尙書)를 지낸 뒤 봉성군(鳳城君)에 봉해진 장을용(張乙用)을 시조로 한다고 한다. 1930년 무렵 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 이원면(伊院面) 일원과, 전라북도 무주군(茂朱郡) 안성면(安城面) 일원에 가장 많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나주(羅州)장씨〕 시조는 조선 인조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른 장세동(張世東)이다. 나주에서 세거하다가 황해도 장연(長淵)으로 옮겨가 터를 잡았는데, 후손들이 본래의 세거지인 나주를 본관으로 삼아 계대(繼代)하고 있다.
〔단양장씨〕 시조는 장씨의 비조 장정필(張貞弼)의 4세손인 장순익(張順翼)으로, 그는 고려조에서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단양군(丹陽君)에 봉해졌다. 유명한 인물로는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장계증(張繼曾),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이름난 유학자 장근(張謹), 고종 때의 의병장 장윤덕(張胤德) 등이 있다.
〔덕수장씨〕 시조는 장순룡(張舜龍;또는)으로, 그는 본래 회회국(回回國) 사람이었다. 고려 원종 때 충렬왕비가 될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충렬왕으로부터 장순룡이라는 성명을 받고 고려 사람이 되었다. 뒷날 덕성부원군(德成府院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덕수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덕수는 경기도 개풍군(開豊郡)에 있던 지명이다. 덕수장씨 가문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조선 중기 한학4대가(漢學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계곡(谿谷) 장유(張維)인데, 그는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로서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양명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 밖에 장유의 아버지로 대제학을 지낸 장운익(張雲翼), 청백리에 녹선된 장선징(張善徵) 등이 유명하다.
[목천(木川)장씨〕 시조는 범장씨(汎張氏)의 원시조인 장백익(張伯翼)이고, 1세조는 고려 때 목천군(木川君)에 봉해진 장빈(張彬)이다. 유명한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싸움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운 충의공(忠毅公) 장윤(張潤), 호성공신(扈聖功臣) 장렬(張洌) 등이 있다.
〔부안(扶安)장씨〕 인동장씨에서 분적하였으며, 시조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한 계통은 고려 때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오른 뒤 부령군(扶寧君)에 봉해진 장연(張淵)이고, 또 다른 계통은 고려 인종 때 복야(僕射)를 지낸 장을호(張乙湖)를 시조로 하는데, 두 사람 모두 장씨의 도시조(都始祖) 장정필(張貞弼) 7세손이다.
〔순천(順天)장씨〕 시조는 고려 명종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중서시랑(中書侍郎)을 지낸 뒤 순천군(順天君)에 봉해진 장천로(張天老)이다. 18세손 장사검(張思儉)이 경상북도 의성(義城)에 터를 잡은 이래 후손들이 그곳에 세거하기 시작하여 안동(安東)·청송(靑松)·영천(永川) 및 충청남도 당진(唐津), 전라남도 광양(光陽) 등지로 옮겨가 산거(散居)하였다.
[안동장씨〕 시조는 중국 저장성[浙江省] 출신인 장정필(張貞弼)이다. 892년 아버지를 따라 신라에 왔다가 18세 때 다시 당(唐)나라에 들어가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뒤 환국하여 영남의 노전(蘆田;지금의 仁同)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고려 태조 때 견훤군(甄萱軍)을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워 삼중대광(三重大匡) 보사벽상공신(保社壁上功臣) 태사(太師)에 오르고 고창군(古昌君)에 봉해졌다. 또한 태조는 고창군(古昌郡)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하고 본관을 안동으로 하사하였다. 유명한 인물로는 조선개국공신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장사길(張思吉), 성리학자 장흥효(張興孝)·장세량(張世良) 등이 있다.
〔영동(永同)장씨〕 시조는 고려 말에 밀직제학(密直提學) 등을 지내고 영산군(永山君)에 봉해진 장항(張沆)이다. 이후의 세계(世系)나 후손들의 분포상황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예산(禮山)장씨〕 시조는 고려 때 이부상서(吏部尙書)·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예산군(禮山君)에 봉해진 장영위이다. 후손들이 예산에 세거하면서 그를 시조로, 예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옥구(沃溝)장씨〕 시조는 고려 때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지내고 옥성부원군(沃城府院君)에 봉해진 장일인데, 그 뒤로 계대(系代)가 실전(失傳), 고려 말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장송을 기세조(起世祖)로, 옥구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울진(蔚珍)장씨〕 시조는 고려 때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내고 울진부원군에 봉해진 장말익(張末翼)이다. 유명한 인물로는 무신집정기 때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낸 장양수(張良守), 조선 인종 때의 학자 장한보(張漢輔), 임진왜란 당시 연안성(延安成) 싸움에서 왜적을 물리친 장응기(張應祺), 인조 때의 성리학자 장효일(張孝一) 등이 있다.
〔인동장씨〕 〈장계(張桂)계〉 시조는 고려 말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예문관대제학을 지내고 옥산군(玉山君)에 봉해진 장계이다. 장계가 인동현 발영전(拔英田)에 터를 잡은 이래, 7세에 이르기까지 후손들이 번성하여 200여 년을 세거하였다. 역대 유명인물로는 조선시대 세조 때 적개공신(敵愾功臣)이었던 장말손(張末孫),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장순손(張順孫) 형제 등이 있다.
〈장금용(張金用)계〉 시조는 고려 초에 삼중대광(三重大匡)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지낸 장금용이다. 후손들이 옥산(玉山:仁同의 옛 이름)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옥산으로 하였으며, 그 뒤 조선 말엽에 옥산이 인동으로 바뀜에 따라 본관을 인동으로 고쳤다. 대표적인 집성촌으로는 인동장씨의 <천년의 터전>이라 할 수 있는 경상북도 구미시(龜尾市) 인동동(仁同洞) 일대를 꼽는데, 시조 장금용이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이래 38대를 내려오면서, 한때는 이웃인 칠곡(漆谷)·선산(善山) 등지에 이르기까지 2000여 호를 헤아릴 정도로 번창한 마을을 형성하였으나 1976년 구미공단의 개발로 구미시가 발족, 인동동으로 편입되면서 급속히 해체되는 변모를 겪게 되었다. 역사상 유명한 인물로는 조선 중엽의 대성리학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광해군 때 영남유생들과 함께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던 유학자 장경우(張慶遇),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팔도도원수 장만(張晩),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장붕익(張鵬翼), 조선 말기 언론계에 투신하여 항일구국의 필봉을 휘두르며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명사설을 남긴 장지연(張志淵) 등을 들 수 있다.
〔전주장씨〕 시조는 장씨의 도시조(都始祖) 장정필(張貞弼)의 5세손이며 고려 초에 이부시랑을 지낸 장지현(張之賢)의 아들로, 전주부원군(全州府院君)에 봉해진 장응익(張應翼)이다. 1930년 호구조사 당시 전라북도 전주에 50여 호가 살고 있었다.
〔절강(浙江)장씨〕 시조는 중국 명(明)나라 저장성[浙江省] 우장현[烏江縣] 사람으로, 정유재란때 원군(援軍)의 장수로 출진하였다가 울산전투에서 부상, 귀국하지 못하고 군위(軍威)에 정착하였던 장해빈(張海濱)이다. 그의 후손들이 군위에 세거해오면서 시조의 출신지를 본관으로 삼아왔다. 역사상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은 없지만, 약 400년 동안 3천여 명의 자손을 번창시킴으로써 임진왜란 때 귀화한 성씨 중에서는 비교적 대성(大姓)으로 발전하였다. 인구수 3120(1985).
〔진주장씨〕 시조는 조선시대에 인진부사(引進副使)를 지낸 장방언(張邦彦)으로, 그의 후손이 강원도 이천(伊川)지방에 많이 살았다. 인구수 2069(1985).
〔창녕장씨〕 시조는 고려 충렬왕 때 보문각태학사(寶文閣太學士)·수국사(修國史)를 지내고 하성군(夏城君)에 봉해진 장일(張鎰)이다. 하성은 창녕의 별호이다. 장일 이후 8세가 연이어 평장사(平章事)를 지냄으로써 고려시대에는 명가(名家)의 반열에 올랐다. 조선시대의 주요인물로는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창산군(昌山君)에 봉해진 장관(張寬),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 장군을 도와 군공(軍功)을 세운 장천장(張天章) 등이 있다. 인구수 4751(1985).
〔흥성(흥덕)장씨〕 시조는 고려 때 광평시랑(廣評侍郎)을 지낸 장유(張儒)이다. 그는 상질현(尙質縣) 사람으로, 신라 말에 난을 피해 중국오월(吳越)로 건너가 중국말을 배우고 고려가 3국을 통일한 뒤 환국하여, 광종 때 중국사신의 빈접(賓接)을 전담하였다. 상질현은 지금의 고창군 흥덕이며 흥성이라고도 한다. 역사상 주요한 인물로는 고려 성종 때 등과하여 호부시랑(戶部侍郎)을 지낸 장연우(張延祐), 조선 중기의 학자로 충군애국(忠君愛國)을 주제로 한 《강호연군가(江湖戀君歌)》를 지은 장경세(張經世), 이인거(李仁居)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소무공신(昭武功臣) 장환`등을 들 수 있다.
〔구례(求禮)장씨〕 봉성(구례의 옛 이름)장씨라고도 한다. 시조는 고려 때 시중(侍中)을 지낸 양간공(襄簡公) 장악(張岳)인데, 일설에는 고려 때 상서(尙書)를 지낸 뒤 봉성군(鳳城君)에 봉해진 장을용(張乙用)을 시조로 한다고 한다. 1930년 무렵 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 이원면(伊院面) 일원과, 전라북도 무주군(茂朱郡) 안성면(安城面) 일원에 가장 많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나주(羅州)장씨〕 시조는 조선 인조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른 장세동(張世東)이다. 나주에서 세거하다가 황해도 장연(長淵)으로 옮겨가 터를 잡았는데, 후손들이 본래의 세거지인 나주를 본관으로 삼아 계대(繼代)하고 있다.
〔단양장씨〕 시조는 장씨의 비조 장정필(張貞弼)의 4세손인 장순익(張順翼)으로, 그는 고려조에서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단양군(丹陽君)에 봉해졌다. 유명한 인물로는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장계증(張繼曾),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이름난 유학자 장근(張謹), 고종 때의 의병장 장윤덕(張胤德) 등이 있다.
〔덕수장씨〕 시조는 장순룡(張舜龍;또는)으로, 그는 본래 회회국(回回國) 사람이었다. 고려 원종 때 충렬왕비가 될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충렬왕으로부터 장순룡이라는 성명을 받고 고려 사람이 되었다. 뒷날 덕성부원군(德成府院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덕수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덕수는 경기도 개풍군(開豊郡)에 있던 지명이다. 덕수장씨 가문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조선 중기 한학4대가(漢學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계곡(谿谷) 장유(張維)인데, 그는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로서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양명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 밖에 장유의 아버지로 대제학을 지낸 장운익(張雲翼), 청백리에 녹선된 장선징(張善徵) 등이 유명하다.
[목천(木川)장씨〕 시조는 범장씨(汎張氏)의 원시조인 장백익(張伯翼)이고, 1세조는 고려 때 목천군(木川君)에 봉해진 장빈(張彬)이다. 유명한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싸움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운 충의공(忠毅公) 장윤(張潤), 호성공신(扈聖功臣) 장렬(張洌) 등이 있다.
〔부안(扶安)장씨〕 인동장씨에서 분적하였으며, 시조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한 계통은 고려 때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오른 뒤 부령군(扶寧君)에 봉해진 장연(張淵)이고, 또 다른 계통은 고려 인종 때 복야(僕射)를 지낸 장을호(張乙湖)를 시조로 하는데, 두 사람 모두 장씨의 도시조(都始祖) 장정필(張貞弼) 7세손이다.
〔순천(順天)장씨〕 시조는 고려 명종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중서시랑(中書侍郎)을 지낸 뒤 순천군(順天君)에 봉해진 장천로(張天老)이다. 18세손 장사검(張思儉)이 경상북도 의성(義城)에 터를 잡은 이래 후손들이 그곳에 세거하기 시작하여 안동(安東)·청송(靑松)·영천(永川) 및 충청남도 당진(唐津), 전라남도 광양(光陽) 등지로 옮겨가 산거(散居)하였다.
[안동장씨〕 시조는 중국 저장성[浙江省] 출신인 장정필(張貞弼)이다. 892년 아버지를 따라 신라에 왔다가 18세 때 다시 당(唐)나라에 들어가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뒤 환국하여 영남의 노전(蘆田;지금의 仁同)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고려 태조 때 견훤군(甄萱軍)을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워 삼중대광(三重大匡) 보사벽상공신(保社壁上功臣) 태사(太師)에 오르고 고창군(古昌君)에 봉해졌다. 또한 태조는 고창군(古昌郡)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하고 본관을 안동으로 하사하였다. 유명한 인물로는 조선개국공신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장사길(張思吉), 성리학자 장흥효(張興孝)·장세량(張世良) 등이 있다.
〔영동(永同)장씨〕 시조는 고려 말에 밀직제학(密直提學) 등을 지내고 영산군(永山君)에 봉해진 장항(張沆)이다. 이후의 세계(世系)나 후손들의 분포상황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예산(禮山)장씨〕 시조는 고려 때 이부상서(吏部尙書)·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예산군(禮山君)에 봉해진 장영위이다. 후손들이 예산에 세거하면서 그를 시조로, 예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옥구(沃溝)장씨〕 시조는 고려 때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지내고 옥성부원군(沃城府院君)에 봉해진 장일인데, 그 뒤로 계대(系代)가 실전(失傳), 고려 말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장송을 기세조(起世祖)로, 옥구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울진(蔚珍)장씨〕 시조는 고려 때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내고 울진부원군에 봉해진 장말익(張末翼)이다. 유명한 인물로는 무신집정기 때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낸 장양수(張良守), 조선 인종 때의 학자 장한보(張漢輔), 임진왜란 당시 연안성(延安成) 싸움에서 왜적을 물리친 장응기(張應祺), 인조 때의 성리학자 장효일(張孝一) 등이 있다.
〔인동장씨〕 〈장계(張桂)계〉 시조는 고려 말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예문관대제학을 지내고 옥산군(玉山君)에 봉해진 장계이다. 장계가 인동현 발영전(拔英田)에 터를 잡은 이래, 7세에 이르기까지 후손들이 번성하여 200여 년을 세거하였다. 역대 유명인물로는 조선시대 세조 때 적개공신(敵愾功臣)이었던 장말손(張末孫),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장순손(張順孫) 형제 등이 있다.
〈장금용(張金用)계〉 시조는 고려 초에 삼중대광(三重大匡)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지낸 장금용이다. 후손들이 옥산(玉山:仁同의 옛 이름)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옥산으로 하였으며, 그 뒤 조선 말엽에 옥산이 인동으로 바뀜에 따라 본관을 인동으로 고쳤다. 대표적인 집성촌으로는 인동장씨의 <천년의 터전>이라 할 수 있는 경상북도 구미시(龜尾市) 인동동(仁同洞) 일대를 꼽는데, 시조 장금용이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이래 38대를 내려오면서, 한때는 이웃인 칠곡(漆谷)·선산(善山) 등지에 이르기까지 2000여 호를 헤아릴 정도로 번창한 마을을 형성하였으나 1976년 구미공단의 개발로 구미시가 발족, 인동동으로 편입되면서 급속히 해체되는 변모를 겪게 되었다. 역사상 유명한 인물로는 조선 중엽의 대성리학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광해군 때 영남유생들과 함께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던 유학자 장경우(張慶遇),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팔도도원수 장만(張晩),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장붕익(張鵬翼), 조선 말기 언론계에 투신하여 항일구국의 필봉을 휘두르며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명사설을 남긴 장지연(張志淵) 등을 들 수 있다.
〔전주장씨〕 시조는 장씨의 도시조(都始祖) 장정필(張貞弼)의 5세손이며 고려 초에 이부시랑을 지낸 장지현(張之賢)의 아들로, 전주부원군(全州府院君)에 봉해진 장응익(張應翼)이다. 1930년 호구조사 당시 전라북도 전주에 50여 호가 살고 있었다.
〔절강(浙江)장씨〕 시조는 중국 명(明)나라 저장성[浙江省] 우장현[烏江縣] 사람으로, 정유재란때 원군(援軍)의 장수로 출진하였다가 울산전투에서 부상, 귀국하지 못하고 군위(軍威)에 정착하였던 장해빈(張海濱)이다. 그의 후손들이 군위에 세거해오면서 시조의 출신지를 본관으로 삼아왔다. 역사상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은 없지만, 약 400년 동안 3천여 명의 자손을 번창시킴으로써 임진왜란 때 귀화한 성씨 중에서는 비교적 대성(大姓)으로 발전하였다. 인구수 3120(1985).
〔진주장씨〕 시조는 조선시대에 인진부사(引進副使)를 지낸 장방언(張邦彦)으로, 그의 후손이 강원도 이천(伊川)지방에 많이 살았다. 인구수 2069(1985).
〔창녕장씨〕 시조는 고려 충렬왕 때 보문각태학사(寶文閣太學士)·수국사(修國史)를 지내고 하성군(夏城君)에 봉해진 장일(張鎰)이다. 하성은 창녕의 별호이다. 장일 이후 8세가 연이어 평장사(平章事)를 지냄으로써 고려시대에는 명가(名家)의 반열에 올랐다. 조선시대의 주요인물로는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창산군(昌山君)에 봉해진 장관(張寬),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 장군을 도와 군공(軍功)을 세운 장천장(張天章) 등이 있다. 인구수 4751(1985).
〔흥성(흥덕)장씨〕 시조는 고려 때 광평시랑(廣評侍郎)을 지낸 장유(張儒)이다. 그는 상질현(尙質縣) 사람으로, 신라 말에 난을 피해 중국오월(吳越)로 건너가 중국말을 배우고 고려가 3국을 통일한 뒤 환국하여, 광종 때 중국사신의 빈접(賓接)을 전담하였다. 상질현은 지금의 고창군 흥덕이며 흥성이라고도 한다. 역사상 주요한 인물로는 고려 성종 때 등과하여 호부시랑(戶部侍郎)을 지낸 장연우(張延祐), 조선 중기의 학자로 충군애국(忠君愛國)을 주제로 한 《강호연군가(江湖戀君歌)》를 지은 장경세(張經世), 이인거(李仁居)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소무공신(昭武功臣) 장환`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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