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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행관련 안내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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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창녕장씨대종회 작성일 22-05-31 09:44 조회 63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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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회 학술이사이신 장인진박사(경상북도 문화재위원)이 작성하시고, 장동표 교수(부산대 역사교육과)가 자문역할 등으로써 두 분께서 협조하시어 작성된 안내판 내용입니다. 





양효각

兩孝閣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대암리 119-1

 

 양효각은 1706년(숙종 32) 경상도관찰사 이야(李壄)의 계청(啓請)으로, 조정으로부터 정려가 내려진 효자 암계(巖溪) 장시행(張是行, 1628-1688)・효자 청계(淸溪) 장익정(張翼禎, 1652-1697) 부자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각(旌閭閣)이다. 초창 이래 여러 차례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였는데, 1860년대 말 중건할 때 소심재(小心齋) 노용규(盧龍奎, 1808-1872)가 상량문을 지었다. 

1917년 양효각을 중수할 때 두 효자의 정려패를 새롭게 판각하고, 흑색 바탕에 흰색 글씨로 칠하여 걸었다. 지금의 건물은 1972년 중건한 것이다. 양효각은 토석 담장으로 둘러 경계를 구획하고, 전면에 일각문을 내어 그 뒤로 지붕을 바짝 붙여 세웠다. 정면 2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집 형식의 건물이다.

장시행의 본관은 창녕(하산)이며, 묵암(默庵) 김정철(金廷哲, 1591-1663)의 문인이다. 효행이 지극하여 의금부도사의 증직과 정려를 받았다. 아들 장익정도 효성이 뛰어나 김해 선비 정옹(酊翁) 조구령(曺九齡, 1657-1719)이 경상도관찰사에게 추천하여 공조좌랑의 증직과 정려를 받았다. 두 사람은 평소 극진한 마음으로 어버이를 봉양하였는데, 빈청에 불이 나는 변고를 당해서는 어버이의 널[柩]을 온전하게 모셨고, 손가락을 베어 어버이 입에 피를 흘려 넣어 수명을 연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효행 사실은 『하산장씨양세실기(夏山張氏兩世實紀)』와 『창녕현지』에 실려 있으며, 고을의 사림(士林)이 부자의 위패를 고강서원(高岡書院)에 모셔두고 제향을 지내왔다. 

 

창녕장씨 암계공파 종중

 

 

 

 

 

 

팔효각

八孝閣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간상리 592-1

 

 팔효각은 창녕(하산) 장씨 가문 여덟 효자의 효행 사실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여덟 분 효자는 산청현감 장순수(張順受, 1529-?)의 후손 가운데 효성이 지극하였던 팔효자를 지칭한다. 

팔효자는 장순수의 아들로 조산대부의 품계를 받은 장승길(張承吉, 1566-1627)을 비롯하여 고행처사로 칭송된 장지백(張之白, 1595-1661), 의금부도사의 증직과 정려를 받은 암계(巖溪) 장시행(張是行, 1628-1688), 공조좌랑의 증직과 정려를 받은 청계(淸溪) 장익정(張翼禎, 1652-1697), 그리고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와 경상도 관찰사의 장계로 급복(給復)의 은전을 받은 장속(張涑, 1687-1764)・장만(張滿, 1700-1742) 형제, 친상에 삼년 복을 더 입은 장한보(張漢輔, 1737-1796), 친상에 3년간 시묘살이한 장한필(張漢弼, 1742-1789) 등 6대에 걸쳐 배출된 여덟 효자이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이 창녕장씨 문중을 ‘6세 8효자 가문’으로 칭송하였다. 

효행 사실은 『석류록(錫類錄)』에 실려 있다. 석류록 서문을 지은 석연(石淵) 이우세(李禹世, 1751-1830)는 “만약 이 여덟 분 효자들이 모두 주자(朱子) 이전 시대에 나왔더라면, 또한 반드시 『소학』 속에 편입되었을 텐데, 애석하도다(此八孝 俱出於朱子前 則亦必編入於小學中矣 惜乎)”라 하였다.

현재 비각은 1949년 건립한 것으로 주변을 토석 담장으로 둘러 경계를 구획하였으며, 전면에 일각문을 세워 ‘불궤문(不匱門)’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현판 글은 『시경』에 “효자가 다하지 않는지라, 길이 너와 같은 효자를 내려 주리로다(孝子不匱 永錫爾類)”에서 취한 것이다. 비각 중앙의 ‘하산장씨육세팔효기실비(夏山張氏六世八孝紀實碑)’의 비문은 현산(玄山) 이현규(李玄圭, 1882-1949)가 지었다. 비각 전면 상단에 ‘팔효각(八孝閣)’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창녕장씨 암계공파 종중

 

 

 

간암재

澗巖齋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간상리 590

 

간암재는 창녕(하산) 장씨 암계 장시행(張是行, 1628-1688)의 후손들이 건립한 재실이다. 건립의 내력을 살펴보면 창녕에는 1703년(숙종 29) 고을의 3효자를 제향하기 위해 창설된 고강사(高岡祠, 뒤에 高岡書院)가 있었는데, 암계(巖溪) 장시행(張是行)과 그 아들 청계(淸溪) 장익정(張翼禎, 1652-1697)이 포함되었다. 1868년(고종 5) 고강서원이 조령(朝令)으로 훼철되자, 자손들이 그 재목을 취하여 1873년 시치[澗赤] 선영 아래 재사를 건립하여 간암재(澗巖齋)라 하고, 무릇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빈객을 접대하며 자손을 교육하였다. 

암계 장시행은 고려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를 역임한 장간공(章簡公) 장일(張鎰)의 후손이며 산청현감 장순수(張順受)의 증손이다. 효행이 지극하였던 장시행과 장익정은 사후 각각 의금부도사와 공조좌랑의 증직과 정려를 받았다. 두 사람은 평소에 지극한 마음으로 어버이를 봉양하였는데, 빈소에 불이 나는 변고를 당해서는 화염을 무릅쓰고 들어가서 어버이의 널[柩]을 온전하게 모시기도 하였고, 손가락을 베어 어버이 입에 피를 흘려 넣어 수명을 연장하기도 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16년에 중건한 것이다. 간암재 중수사실은 후손 장대선(張大璿, 1858-1926)이 짓고, 중건기는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1873-1933)이 지었다. 간암재에는 고강서원 훼철 당시 조각이 났던 ‘고강서원(高岡書院)’ 목재 편액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창녕장씨 암계공파 종중

 

 

 

 

 

 

 

 

창녕장씨 효자 여묘처

昌寧張氏 孝子 廬墓處

 

 

경상남도 창녕군 대합면 합리 1145번지

 

 이 묘소는 효자 장속(張涑)・장만(張滿)의 어머니 창녕조씨(昌寧曺氏)가 1721년 별세하자, 아우 장만이 3년 동안 지성으로 시묘살이한 사실을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가 듣고 이를 조정에 알림으로써, 급복(給復)의 은전을 받게 되었다는 유서 깊은 곳이다. 

장만(1700-1742)은 창녕(하산) 장씨 가문 여덟 효자에 포함된 인물로,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행으로 소문이 났다. 1716년 부친이 별세할 때 17세였는데 손가락을 베어 입에 피를 흘려 넣어 수명을 연장하였고, 모친 별세 때에도 효성을 다하였다. 이곳 묘소는 당시 사방 10리에 인적이 드문 산간벽지였는데도 홀로 어머니 묘소를 지키며 3년상을 마쳤다. 

그의 형 장속(1687-1764)도 손가락을 베어 어버이 입에 피를 흘려 넣어 수명을 연장하는 등 효행이 뛰어났다. 당시 암행어사 박문수는 형제의 효도와 우애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면서, “두 형제는 30여 년을 한 방에서 함께 기거하여도 편안하게 즐기니, 종들이 싸우지 않고 닭과 개도 서로 싸우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경상감사도 1731년(영조 7) 장계를 올려 형제 급복의 은전을 받게 하였다. 

창녕장씨 가문에서 6대에 걸쳐 8효자가 배출된 것은 『시경』에 “효자가 다하지 않는지라, 길이 너와 같은 효자를 내려 주리로다(孝子不匱 永錫爾類)”라는 큰 의미를 되새길 수 있어서 후대에 귀감이 된다.

 

창녕장씨 암계공파 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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