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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의 성씨와 창녕장씨 족보인물에 대하여--장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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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8-05-28 12:43 조회 1,68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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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26 '창녕장씨 수도권 지회'창립모임에서 장인진 학술이사의 강연 자료입니다.

우리 일가들의 뿌리교육을 올립니다.

 

창녕 본관의 姓氏와 창녕장씨 족보 인물에 대하여

                                                   
                                                      
1. 머리말

  족보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 가문의 계통을 始祖로부터 父系 중심으로 알기 쉽게 표기한 것으로, 동일 혈족의 원류(源流)와 함께 결합된 인간관계를 밝히고 조상의 업적과 혈통을 존중하며, 종족간의 화목을 도모하고자 편집한 가문의 역사책이다.
  『예기』의 「대전」 편에 의하면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의 종법(宗法)을 밝히면서 “人道는 부모를 섬기는 것이며, 부모를 섬기는 까닭으로 조상을 존경하고, 조상을 존경하는 까닭으로 종족을 공경하며, 종족을 공경하는 까닭으로 일족(一族)을 모우고, 일족을 모우는 까닭으로 종묘(宗廟)를 존중하여 엄하게 한다.”라 하였다.
  또 주희(朱熹)가 지은 『가례』를 살펴보면 사족(士族) 가문에서는 ‘소종(小宗 : 高祖 중심)과 ‘오복도(五服圖)’를 중시하여 제례를 행하고 있는데, 행사(行祀)의 대수는 4대 봉사(奉祀 : 高祖까지)가 중심이 되었다. 
  우리나라 족보 가운데 최고본(最古本)은 성종 7년(1476)에 안동에서 간행한 󰡔安東權氏家譜󰡕(成化譜)이다. 이 책은 高祖 중심의 小宗 족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명종 20년(1565)에 󰡔文化柳氏世譜󰡕(嘉靖譜)가 경상도 의성(義城)에서 간행되었는데, 이 족보는 류희잠(柳希潛)이 20여 년간 수집하여 10권으로 묶은 것이다. 이 책을 살펴보면 당시까지 유행한 小宗 중심의 가보(家譜)에서 탈피하고, 내외 자손을 총 망라한 만성보(萬姓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창녕 지방의 성씨 분포는 어떠한가?
  조선초기 이전에 존재한 昌寧의 토착 성씨(姓氏)는 9개 姓으로 밝혀지고, 조선중기까지 존재하고 있던 창녕을 본관(本貫)으로 한 성씨는 40여 성이 넘었는데, 현재 5개 성씨만 남아 있다.   

2. 창녕의 연혁과 토착 성씨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창녕은 본래 신라 비자화군(比自火郡 : 一云 比斯伐)인데, 진흥황(眞興王) 16년(555년)에 下州의 치소(治所)를 두었으나 5년 뒤에 폐지하였으며,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4년) 때 화왕군(火王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고려 太祖 때에 이르러 지금의 이름인 昌寧으로 고쳤다. 그 후 顯宗(재위: 1009-1030) 때에 密城郡의 속읍(屬邑)되었고, 明宗(재위: 1170-1197) 때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 감무를 縣監으로 고쳤다.” 하였다. 郡의 이름으로 比自火, 比斯伐, 火王(火旺), 下州, 昌山, 昌城, 夏城, 夏山 등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인조(仁祖) 9년(1631년)에 지도([成]至道)의 역변(逆變)으로 현(縣)이 혁파되어 [成]至道의 역변으로 1631년 3월 19일에 창녕현감을 파직하고, 읍호를 강등하였다.
 영산현(靈山縣)에 합속(合屬)되었다가 6년 후(1637년)에 어영군(御營軍)의 상언(上言)에 의해 昌寧縣으로 복현(復縣)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昌寧縣에 수록된 토착 성씨는 張氏, 成氏, 鄭氏, 曺氏, 韓氏, 表氏, 河氏, 六氏(一作卞), 『增補文獻備考』, 卷53, 32頁에 本貫이 명시되지 않은 六氏가 있다. 이 책의 卞氏 條에 昌寧卞氏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이 六氏는 昌寧六氏가 아닌가 한다.
 崔氏 등이 있다고 하였다. 이 9개 성씨는 조선초기 이전에 昌寧을 本貫으로 한 성씨라 하겠다.

3. 창녕을 본관(本貫)으로 하는 성씨

  우리나라 姓氏는 조선초기 자료인 󰡔세종실록지리지󰡕에 250여 姓, 1486년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에 277姓으로 확인되고 있다. 다시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조선중기 이전까지 본관별(本貫別) 姓氏가 수록되어 있는 󰡔증보문헌비고󰡕에서 姓氏 本貫이 496姓 9,519本임을 확인할 수 있고, 일제강점기까지 本貫別 姓氏가 수록되어 있는 󰡔청구씨보(靑邱氏譜)󰡕 宋啓升를 포함하여 아들 宋奎淵, 손자 宋基夏 등 3대가 50여 년에 걸쳐서 수집한 각 성씨의 족보
에서는 492姓 1,207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로 보면 조선후기로 오면서 姓氏의 변화는 없으나, 本貫의 數는 약 8분의 1로 감소하였다. 이 점은 당초 小宗(高祖 중심)의 本貫에서 후대로 오면서 각 姓氏의 本貫끼리 합족(合族 : 收族) 대동화(大同化)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증보문헌비고』에서 昌寧을 本貫으로 한 姓氏를 조사한 사실에서도 입증이 된다. 이 자료에 의하면 昌寧李氏를 포함하여 金, 朴, 鄭, 崔, 柳, 申, 趙, 韓, 吳, 張, 徐, 成, 宋, 兪, 黃, 曺, 林, 羅, 孫, 盧, 蔡, 丁, 裴, 郭, 邊, 愼, 白, 全, 田, 玄, 河, 陳, 廉, 方, 孔, 咸, 薛, 表, 魯, 仇, 甘, 石, 貢, 印, 秋 등 무려 46개 姓氏가 창녕을 本貫으로 삼은 姓氏임을 알 수 있었다. 46개 姓氏 중에서 지금은 成氏, 曺氏, 張氏, 李氏, 鄭氏 등 5姓氏만 남아 있다.

4. 장씨(張氏)의 본관

  조선시대 장씨의 본관도 매우 많았다.
  『증보문헌비고』에 수록된 장씨의 본관을 조사해보면 인동장씨(仁同張氏)를 포함하여 총 245본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조선 팔도에 고루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仁同, 德水, 永同, 昌寧, 興德, 尙質, 蔚珍, 安東, 木川, 鎭川, 結城, 求禮, 康津, 川寧, 沃溝,    興海, 晉州, 扶安, 海豐, 順天, 太原, 永嘉, 開城. 江華, 河陰, 廣州, 驪興, 楊州, 豐壤, 洪陽,    喬桐, 水城, 龍城, 南陽, 延昌, 仁川, 富平, 長湍, 利川, 通津, 安城, 楊根, 安山, 朔寧, 高陽,    交河, 加平, 陽川, 振威, 陽成, 砥平, 抱川, 積城, 淸州, 洪州, 熊州, 淸風, 天安, 沃川, 安邑,    陽山, 溫陽, 大興, 太安, 舒川, 韓山, 毛坤, 瑞山, 牙山, 德山, 稷山, 定山, 靑陽, 淸安, 懷德,    扶餘, 石城, 陰城, 保寧, 懷仁, 唐津, 禮山, 燕歧, 紆州, 沃野, 伊城, 綾城, 羅州, 長山, 光州,    長城, 南原, 楡谷, 長興, 潭陽, 礪山, 淳昌, 寶城, 古阜, 荒調, 靈光, 珍島, 錦山, 富利, 龍潭,    富潤, 金溝, 櫟陽, 保安, 光陽, 龍安, 咸悅, 桃田, 咸平, 泰仁, 南平, 井邑, 澮尾, 鎭安, 馬靈,    茂長, 務安, 長水, 同福, 興陽, 海南, 慶州, 杞溪, 豐山, 尙州, 化寜, 功城, 靑里, 達城, 昌原,    星州, 壽城, 金海, 密陽, 善山, 靑松, 蔚山, 河東, 順興, 咸陽, 陜川, 草溪, 淸道, 多仁, 榮川,    梁山, 咸安, 豐基, 固城, 義城, 龍宮, 彦陽, 聞慶, 咸昌, 知禮, 安陰, 高靈, 玄風, 丹城, 比安,    軍威, 義興, 延日, 長䰇, 機張, 熊川, 江陵, 原州, 光海, 鐵原, 三陟, 寧越, 平海, 旌善, 杆城,    高城, 平昌, 金城, 楊口, 狼川, 平康, 安峽, 海州, 延安, 谷山, 平山, 白川, 金川, 文化, 長淵,    長延, 松禾, 永興, 吉城, 安邊, 登州, 瑞谷, 長津, 鍾城, 茂山, 平壤, 義州, 安州, 定州, 昌城,    成川, 宣川, 龍川, 祥原, 順川, 雲山, 嘉山, 順安, 孟山, 江東, 永海, 寧城, 永城, 高州, 大完,    洪城, 元州, 玉川, 文城, 安興, 端安, 宣山, 化山, 淸陽, 啓陽, 沃山, 仁平, 寶寜, 寶城, 丹原,    廣永, 長澤, 大明, 濟州, 甲山

  『증보문헌비고』에 수록된 본관 수는 당시 서울과 지방의 장적(帳籍: 戶口單子)에 기록된 것과 여지승람(輿地勝覺), 읍지(邑誌) 등에 나타난 것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지난 2015년 통계청의 인구·주택 총조사 자료에 의하면 현재 張氏의 본관은 仁同, 丹陽, 安東, 興德, 蔚珍, 結城, 德水, 興城, 木川, 求禮, 玉山, 順天, 沃溝, 昌寧, 浙江, 扶安, 禮山, 鳳城, 夏山, 玉城, 羅州, 鎭川 등 22본(북한 제외)이 확인되고 있다. 이 가운데 興城은 興德, 玉山과 玉城은 仁同, 夏山은 昌寧의 고호(古號)가 되므로 실제 18本이 존재하는 셈이다.
  이와 같이 장씨의 본관이 급격하게 줄어든 것은 후대로 오면서 本貫이 자연 소멸되었거나, 아니면 장씨의 다른 본관으로 대동 합보(大同 合譜)한 것이라고 본다.
  2015년 통계조사 당시에 창녕장씨의 경우, ‘昌寧 本貫’은 4,814명(492위), ‘夏山 本貫’은 1,238명(803위)를 보였다. 두 본관을 합하여도 6,052명으로, 우리나라 성씨 분포 461위에 해당하는 소규모 성씨 집단임을 알 수 있다.

5. 창녕장씨(昌寧張氏) 족보 발간

  창녕장씨의 족보는 1844년(헌종 10)에 간행하였는데, 서문(序文)은 승정원(承政院)의 우승지(右承旨)를 지낸 성대진(成大璡)이 찬하였다.
  창녕장씨의 족보는 초간본이 비교적 후대가 되는 19세기 중엽에 발간하였으므로, 각종 문헌자료에서 창녕장씨로 표기된 인물과 대비해 보면 누락된 사람이 더러 있다. 예컨대, 判官 張仁敬은 1613년에 生員試에 입격한 郭有道(1577-?)의 妻父이다. 張繼仁, 張文迪(萬戶) 등은 창원향안에 등재된 인물이다. 1584년 武科에 급제한 張迪과 그 아버지 張伯仁(참봉), 아우 張遇 등도 수록되지 않았고, 1543년 譯科에 급제한 張世崐과 그 아버지 張碩文도 수록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문과(文科), 무과(武科)의 급제자나 사마시(司馬試)의 입격자 중에서도 몇 분이 누락되어 있다.
  장녕장씨 족보는 그 후로 을해보(1775년), 경술 속보(1910년), 무자보(1948년), 갑인보(1974년), 계미보(2003년) 등이 출간되었다.
  조선시대의 향안(鄕案)은 사족(士族)의 명부이다. 입록 되기가 매우 까다로웠는데,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창녕장씨의 인물은 『창녕향안』, 『창원향안』, 『김해향안』, 『청도향안』, 『의령향안』 등에 수록되어 있다.

    1) 창녕향안(9인)

  *張順受 승지공 휘 友誠의 曾孫이며 휘 華의 아들
系(5대 9인) : 子 張承吉 / 孫子 張之白 / 曾孫 張是文, 張是行. 張是亨                              / 玄孫 張翼禎, 張翼禧 / 5대손 張潝, 張涑

    2) 김해향안(17인)

  *張之白 系(4대 12인) : 子 張是文 / 孫子 張翼漢, 張翼世 / 曾孫 張澂, 張泓,
                            張涉, 張㶅(沃), 張泂 / 玄孫 張胤夏
                          曾孫 張潝(巖溪公 孫) / 玄孫 張重夏
                        子 張是亨
                         *未詳 : 張郁夏, 張復夏, 張漢植, 張漢一
  *張應年 전한공 휘 仲誠의 曾孫이며 휘 世沉의 아들
 系(1인) :    子 張翼參
 
    3) 청도향안(3인)

  *張應年 系(3대 3인) :  子 張翼參 / 孫子 張克後 / 曾孫 張時傑

    4) 창원향안(11인)

  *張義 始祖 장간공의 13世(12대손)
 系(1인) :      子 張翼(府使公 派祖)
  *張煦 전한공 휘 仲誠의 아들
 系(2대 5인) :  孫子 張斗年, 張聃年 / 曾孫 張益祺, 張益奎, 張益璧 
  *張興世 승지공 휘 友誠의 曾孫이며 휘 蘭의 아들
 系(3대 3인) : 子 承福 / 孫子 之皛 / 曾孫 時翰
                           *未詳 : 張繼仁, 張文迪(萬戶)

    5) 창원 향선생안(4인) 창원부 편, 『乾隆三十八年七月日鄕先生案重修』, 1773년 필사본


  *張時翰 系(2대 2인) :   孫子 張衛宸 / 曾孫 張爾權
  *張益奎 系(2대 2인) :   玄孫 張漢臣 / 5대손 張再邦(再房) 

    6) 의령향안(1인)

  *張煦 系(1인) :  子 張世深(張世沉 弟)

  창녕장씨는 여섯 곳의 향안(鄕案)에서 총 45인이 등재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영남에서는 사족(士族)으로 주목을 받았다고 본다.
  향안에 등재된 사람들은 대개 족보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창원향안』에 등재된 장계인(張繼仁), 장문적(張文迪)은 조선전기 인물로 추정되는데 족보에 누락되어서 계통을 알지 못한다.
  또 『김해향안』에 17인이 수록되어 있는데 장욱하(張郁夏), 장복하(張復夏), 장한식(張漢植), 장한일(張漢一) 등 4인은 시조의 25世의 ‘夏’字 항렬(行列)과 동항(同行)으로 쓰는 ‘漢’字를 사용하였으므로, 고행처사 휘 之白의 계통이 분명하다. 족보에 누락되어 있는데, 후손이 없었는지 수단비를 내지 않아서 누락되었는지 노상추,『盧尙樞日記』(국사편찬위원회 간행)를 보면 1796년의 경우, 수단비(名下錢)를 내지 않으면 족보의 해당 부분의 책을 인출해주지 않아서 파계 아래의 이름자 入錄에 대해 다시 거론하지 못하게 한 일이 있다.
 알 수 없다.
  이로 보면 창녕장씨 족보가 초간본이 나오기 1세기 이전이 되는 18세기에 발간이 되었더라도 여러 문헌을 고증하여 더 많은 인물이 축적되어 기반을 다졌을 것이다.

6. 파별 세계도와 주요 인물

  1) 세계도


  2) 고려, 조선시대 주요 인물

    (1) 시조

  장간공(章簡公) 장일(張鎰)의 초명은 민(敏)이고 자는 이지(弛之)이다. 1207년에 출생하여 17세가 되던 1223년에 문과 을과 제 2인(41명 중 2위)으로 급제하였다. 급제한 후 집에서 15년을 지내다가 승평판관(昇平判官)에 임명되었고, 안찰사 왕해(王諧)가 추천하여 직사관(直史館)이 되었으며, 이어서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다. 1252년에 이현(李峴)이 몽고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대몽 외교에도 공헌하였다. 1261년에 시어사(侍御史), 전라·충청·경상 3도 안찰사(三道 按察使),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병부시랑(兵部侍郎), 예부시랑(禮部侍郎), 1264년에 국자좨주(國子祭酒), 1265년에 중서사인(中書舍人),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1268년에 예부상서(禮部尙書), 1271년에 경상도수로방호사(慶尙道水路防護使), 1272년에 한림학사(翰林學士), 1274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1275년에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 보문서대학사(寶文署大學士) 수국사(修國史) 등을 역임하고 하성군(夏城君)에 봉군되었다.
  전후(前後) 8회에 걸쳐 몽고에 사신으로 갔으나 나라를 욕되게 한 적이 없었다. 1276년 5월 3일에 졸하였다. 시호는 장간공(章簡公)이다. 『고려사』의 사평(史評)을 보면 “장일의 성품은 온화하고 공손하면서도 정직하였으며, 문장을 짓는 데 뛰어나고 吏才(관리로서의 재질)가 우수하였다.”라고 하였다. 詩 2수가 전하고 있다.

      過昇平郡(승평군을 지나며) 
   霜月凄涼燕子樓 : 서릿발 같이 찬 달빛 처량한 연자루(燕子樓)에는
   郞官一去夢悠悠 : 낭관(郎官) 한번 간 후로 꿈만 아득하였네.
   當時座客休嫌老 : 당시 자리에 있던 손님을 늙었다고 혐의하지 마소
   樓上佳人亦白頭 : 누각 위의 아름답던 그 여인도 백발이 되었네.

     東都懷古(동도에서 옛 일을 생각하며)
   四百年前將相家 : 4백 년 전 장군과 재상들이여
   競開臺榭幾雄誇 : 누대 다투어 지어 놓고 얼마나 웅장함을 자랑했을까
   只今繁麗憑誰問 : 이제 그 번성하고 화려하던 일 누구에게 물으리
   野杏山桃泣露華 : 들살구와 산복숭아가 이슬 꽃으로 울며 답하네.

    (2) 파조. 문과, 무과, 사마시

  張躋 : 고려 成均學生으로 등과하여 副令, 知制誥에 이름. 復齋 鄭摠과 교분 있음
  張寬(창산군파 파조) : 密直副使, 上護軍, 漢城左尹, 開國原從功臣 昌山君에 봉군
  張翼(부사공파 파조) : 벼슬이 府使에 이르렀다. 昌原鄕案에 이름이 실려 있음
  張莪 : 세종 병오(1426년) 문과 급제하여 翰林, 持平, 平壤庶尹 역임 (昌)
  張友誠(승지공파 파조) : 세조 때 승정원 都承旨에 이르렀다.
  張繼曾 : 세종 임술(1442년) 문과 급제하여 兵曹正郎, 佐翼原從功臣에 책록 (昌)
  張繼弛 : 문종 신미(1451년) 문과 급제 獻納, 司成에 이름, 理學精博 有操行 (昌)
  張仲城(전한공파 파조) : 세조 임오(1462년)에 문과 급제하여 홍문관 典翰에 이름
  張汝弼(맥계공파 파조) : 호는 맥계(麥溪)이며, 세조 때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張孝誠(참봉공파 파조) : 벼슬이 참봉(參奉)에 이르렀다.
  張禧 : 진사로서 연산군 무오(1498년)에 문과 급제 (昌)
  張諶 : 연산 을묘(1495년)에 生員, 進士 양 시(兩試)에 입격 (麥)
  張昕 ; 연산 을묘(1495년)에 生員 2등 제1인으로 입격 (承)
  張應星(1449-?) : 중종 임오(1522년) 문과 급제, 密陽府使, 綾州牧使에 이름 (麥)
  張順受(1529-?) : 명종 병진(1556년)에 문과 급제하여 호조정랑에 이름 (承)
  張時翰 :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호종(扈從),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에 이름 (府)
  張時憲(1562-?): 광해 병진(1616년) 무과장원, 병자란 때 남한산성 호종,五衛將(府)
  張鳴漢(1629-?) : 현종 경자(1660년)에 무과, 濟物萬戶 別害僉使에 이름 (麥)
  張天漢(1648-?) : 숙종 병진(1676년)에 무과 병과 급제 (麥)
  張萬甲(1679-1738) : 숙종 임진(1712년)에 무과, 武兼宣傳官, 碧團僉使에 이름 (麥)
 
     (3) 효자

  장승길(張承吉, 1566-1627)
    字는 善裕이고 호는 동암(東巖)인데,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올랐으며, 품성이 순      선(純善)하고 부모 섬기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효천(孝薦)되었다. (承)
   *公으로부터 아래까지의 6세에 걸쳐 8효자가 나왔다.
  장지백(張之白, 1595-1661)
    字는 士皓이다. 품성이 괴이(魁偉)하고 부 모 섬기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효천(孝      薦)되었고, 세상에서 고행처사(高行處士)라 칭송되었다. (承)
  장시행(張是行, 1628-1688) 
    字는 德源이고 호는 암계(巖溪)이다. 묵암 김정철(金廷哲) 선생의 문인이다. 특히      효성이 뛰어나서 경상도관찰사 이야(李埜)의 장계로 조정으로부터 承訓郞 義禁府      都事에 증직되고,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창녕 高岡書院에 제향되었다. (承)
  장익정(張翼禎, 1652-1697) 
    字는 景徵이고 호는 청계(淸溪)이다. 검암 손전(儉庵 孫佺) 선생 문하에 종유(從      遊)하였고, 효성이 뛰어나 김해의 선비 조구령(曺九齡) 등의 추천과 경상도 관찰      사의 장계로 인해, 조정으로부터 承訓郞 工曹佐郞에 증직되고, 정려(旌閭)가 내려      졌으며, 창녕 고강서원(高岡書院)에 제향되었다. (承)
  장속(張涑, 1687-1764) 
    字는 仲光인데 효성이 지극히 높았다.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의 장계(狀啓)와       감영(監營)의 장계로 급복(給復)의 은전이 내려졌다. (承)
  장만(張滿, 1700-1742) 
    字는 謙叔인데 효성이 지극히 높았다.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의 장계와 감영(監      營)의 장계로 백형 張涑과 함께 급복(給復)의 은전이 내려졌다. (承)
  장한보(張漢輔, 1737-1796) 
    字는 汝順인데 선대의 정훈(庭訓)을 계승하여 효성이 지극히 돈독했으며, 친상(親      喪)에 3년복을 더 입는 등, 그 효심에 하늘이 감동하여 사람을 움직였다.(感天動      人) (承)
  장한필(張漢弼, 1742-1789) 
    字는 帝用이고 부모 섬기는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친상(親喪)을 입고 여묘(廬       墓)살이 3년 동안 애훼(哀毁)를 하니 도내 유림(儒林)에서 일제히 효천(孝薦)하였      다. (承)
  장재환(張再煥, 1808-1894) 
    字는 奉必이고 호는 은암(隱菴)이다. 의정부 참정(參政)에 추증되었으며, 효행이      뛰어나서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昌)
  장원호(張元昊, 1831-1908) 
    字는 斗明이고 호는 송포(松圃)이다. 벼슬이 의정부 참정(參政)에 이르렀으며, 효      행이 뛰어나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昌)

     (4) 충신

  장승지(張承祉, 1546-?)  
    字는 熙彦, 품계는 통덕랑(通德郞)이다. 임진란(壬辰亂)에 창의(倡義)하여 사절(死      節)하였으며, 사적이 『창녕읍지』에 실려 있다. (參)
  장천장(張天章, 宣祖 朝)
    字는 敬閏이다. 임진란(壬辰亂)이 일어나자 선조(宣祖)를 의주까지 호가(扈駕)하였      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 휘하의 옥포(玉浦) 전투에 참가하여 군공(軍功)이 있었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고 벼슬이 무 승지(武承旨)에 이르렀으      며, 사적이 『고흥읍지』와 『호남절의록』에 실려 있다. (府) 

     (5) 열녀

  孫起後의 부인 張氏(典翰 張仲誠 後孫) : 선조 임진란(壬辰亂) 때 열녀이다. (典)
  金壽恬의 부인 張氏(縣監 張順受 女) : 남편 사망하자 상복입고 7년이 되던 1580      년 당시까지 朔望마다 제전(祭奠)올리는 정성을 다하였다.(鄭逑, 寒岡勸懲案) (承)
  張再煥의 부인 陳氏 : 열행(烈行)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짐 (昌)
 
     (6) 학문

  張警百 : 字는 耆叟이고 호는 道村,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의 문인이다. (麥)
  張益祺(1569-?) : 字는 德敬, 한강 정구(寒岡 鄭逑)의 문인이다. (典)
  張益奎(1571-1631) : 字는 文哉, 호는 于房이다. 한강 정구(寒岡 鄭逑) 선생을 사      사(師事)하여 강학(講學)에 정박(精博)하고 더욱 조행(操行)이 있었다. 한강선생을      위하여 관해정(觀海亭)을 중건한 바 있고, 창원의 檜原書院을 창건하였다. (典)
  張是行(1628-1688): 호는 암계(巖溪), 묵암 김정철(黙庵 金廷哲 : 寒岡 - 成芙蓉堂 淵源)      의 문인이며, 효자로 이름이 났다. (承)
  張時傑(1634-?) : 字는 汝愚이고, 이요재 장방익(二樂齋 蔣邦翼)의 문인이다. (典)
  張之翰(1750-1790) : 字는 德五이고, 호는 이요재(二樂齋)이다. 행검이 있었다.(麥)
  張博翼(1756-1822) : 字는 鵬擧, 호는 청천재(聽天齋)인데, 『지씨홍사(池氏鴻史)』의      간행본(刊行本) 글씨를 썼다.(麥)
 
     (7) 기타 행적

  張大受 : 창녕현감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가 1580년에 창녕의 권징안(勸懲案)을       작성할 때 상정유사(詳定有司)를 맡았음 (承)
  張潝, 張㶅, 張泓 : 1724년 장희빈(張禧嬪)의 추보(追報 : 죽은 이에게 보답)와 설      원(雪冤 : 억울함을 씻음)을 청하는 경상도의 유소(儒疏)에 참여하였음 (承)
  3) 간행본 문집을 남긴 인물

   張大璿(1858-1926) : 호, 송오(松塢), 행실돈독(河晦峯), 松塢遺稿(石版), 2권1책 
   張承杓(1875-1942) : 호, 회와(悔窩), 면우 곽종석 문인, 悔窩文集(木活), 5권2책 
   張世杓(1883-1957) : 호, 간서(澗西), 심재 조긍섭 문인, 澗西遺稿(石版), 4권1책 
   張斗翰(1910-1981) : 호, 눌암(訥庵), 심재 조긍섭 문인, 訥庵遺集(石版), 2권1책 

6. 마무리

  창녕장씨는 현재 6,000여 명으로 소단위 성씨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문한이 계승되어 온 집안이었다.
  창녕향교는 효종 때 본향의 18문중에 의해 창건되어 운영되었는데, 창녕장씨는 향교 창건 당시의 18문중에 들었으므로, 재지 사족(在地 士族)으로서 예우를 받았다.
  최근 미국 컬럼비아대학, 영국 옥스포드대학 등의 학자들은 세계 최대 족보 사이트에서 내려 받은 8천 6백만 명의 자료를 분석하여 약 500년 전 조상과 그 후손들의 생사와 결혼, 이주 정보 등 삶이 담긴 1천300만여 명의 족보(가계도)를 완성했다고 하면서, 그 내용을 분석한 논문을 학술지 '사이언스'에 2018년 3월 1일 발표하였다. 이렇듯 세계 과학계에서도 족보에 대한 관심이 높다. 우리나라 또한 족보의 출판량은 계속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근자에는 호적부 제도가 개인별 가족관계 등록부 제도로 바뀌었는데, 이 점은 지난날 가문(家門)과 문중(門中)을 중히 여기던 제도에서, 양성 평등사상에 입각하여 가정(家庭)을 중시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3년 전에 실시한 통계청의 「2015년 인구주택 총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姓氏와 본관(本貫)은 총 5,582姓에 36,744개 본관으로 조사되었다. 성씨 가운데 한자(漢字)가 있는 성씨는 1,507개, 한자가 없는 성씨는 4,075개였으니, 한자(漢字) 있는 성씨가 늘어난 원인은 복성 창씨(複姓 創氏), 고아 창씨(孤兒 創氏) 등의 영향이라 할 것이고, 한자 없는 4,075개의 성씨는 외국인이 귀화하면서 만들어진 다문화 가정의 성씨인 셈이다. 또 36,744개의 본관(本貫) 가운데 1,000명 이상이 쓰는 본관은 859개로 전체 97.8%에 해당하는 약 4,861만 명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성씨와 본관이 대폭 늘어나서 한 층 다양화 된 사회로 변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례에 보듯이 가족의 개념이나 성씨의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이제부터는 남성 중심적 가족문화를 개선하고, 가정에서는 부부화합, 가족화목을 우선시 하는 새로운 가규(家規)를 세워야 할 때다. 가규(家規)를 세우게 되면 ‘나의 성명(姓名)과 본관(本貫)’을 소중히 여기게 될 것이니, 族譜에 대한 관심도 자연 높아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 종원들은 선대를 추모하고 일가 간에 화목을 도모하며, 족보를 통한 뿌리 의식을 배우고 가정교육에 활용한다면 가정의 화합뿐만 아니라 건전한 사회 풍토를 조성하는데도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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