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공 묘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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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5-01-11 08:42 조회 1,837회 댓글 0건본문
전한공묘갈명(典翰公墓碣銘)
公의 姓은 張氏이고 諱는 仲誠이며 字는 輔仁이다. 공의 시조는 張貞弼인데 본래 중국의 浙江人으로 吏部尙書로서 동쪽(東國)으로 出事하였다. 고려 태조 때 큰 공을 세워 관직이 太師에 이르고 忠獻이라는 시호를 받아 權太師·金太師와 함께 花山祠 배향되었다. 후손인 章簡公 張鎰은 夏山君에 봉해졌으니, 이로 因하여 그 자손들이 貫鄕을 夏山으로 하였는데 지금의 昌寧이다. 이로부터 연속하여 9세를 이어 平章事가 배출되었다. 典理佐郞 張台柱는 조선조에 들어와 벼슬을 하였고, 좌랑은 判決事 張義를 낳았으며, 판결사는 예조참판 張軫을 낳았고, 참판은 문과에 급제한 司正 張自洪을 낳았는데, 이 분이 公의 아버지이시다.
公은 세종 27년(1445) 을축년에 태어났으며, 세조 5년(1459) 기묘년에 성균관 生員에 입격하고, 다시 세조 8년(1462) 임오년에 문과에 응시하여 乙榜으로 등과하였다. 다시 5년이 지난 병술년(1466)에 重試에 합격하여 直長, 主簿를 거쳐 관직이 홍문관 典翰에 이르렀다. 처음에 公은 창녕에서 창원의 檜原으로 옮겨 살았고, 장지는 金海府 북쪽에 위치한 羅田으로 지금의 『金海邑誌』에 보인다. 配位는 海州吳氏로써 合墳하였다. 아들 煦는 純陵參奉인데, 네 아들을 두었다. 世沉은 郡守, 世渾, 世漢은 判官, 世深은 僉使이다. 증손 彭年은 縣監, 聘年은 護軍, 斗年과 應年은 縣監이다. 현손 益祺는 參奉이고, 益奎는 號가 于房이며 역시 參奉인데, 형제 함께 寒岡 鄭逑 선생에게 수학하여 선비들에게 명망이 있었다.
후손이 되는 駿昊가 公의 묘소에 비석이 없어 나에게 墓碣銘을 請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께서 立朝한 사실이 言行으로 미친 것과 詩文이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히 고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佔畢齋 金宗直 선생이 公에게 보낸 詩 한 편의 末句에 ‘도시락에 설 고기가 남아 있으니 애오라지 자네와 마주하여 먹고 싶네(行厨餘臘味 聊欲對君嘗).’라고 한 것이 증빙이 되니 그대는 사양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공은 점필재 선생보다 14세 연하이고 관직 또한 낮으니 선생과 상대할 바는 아니겠으나, 선생께서 뜻 부침이 이와 같으니 이는 스승과 제자임에 의심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선생이 평일에 敬重히 여겼겠습니까. 진실로 다른 사람과 다름이 있으니 銘을 할 만합니다.” 하였다. 銘을 하여 가로되,
取科第 如摘髭平 : 과거 급제하기에는 턱 밑에 수염 뽑듯이 다스렸는데
步登瀛 不顯其光 : 瀛州[홍문관]에 올랐으나 그 빛이 드러나지 않았네.
獲親有道 : 친히 가르침 받아서 道가 있으니
曷不飽德 臘味之嘗 : 어찌 德을 배불리 할 설 고기의 맛을 보지 않겠는가.
晋康 河謙鎭(1870~1946)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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