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향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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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5-03-04 15:13 조회 2,172회 댓글 0건본문
창녕향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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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간행 창녕향안증주(昌寧鄕案增註)
1940년 지금의 경상남도창녕 지역에서 간행된 향안(鄕案)이다. 향안은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해당 고을 양반들의 지방자치기구인 유향소(留鄕所) 참여 인원들의 명단이었다. 즉 향안에 기재됨으로써 유향소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지역 여론을 주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본 자료에는 1600년부터 1820년까지 창녕향안(昌寧鄕案)에 기재된 인물을 망라해 놓았으며, 각 인물마다 인적사항을 세주로 기재해 놓은 자료이다. 모두 786명이 기재되어 있는데, 창녕성씨(昌寧成氏)와 광주노씨(光州盧氏) 두 가문 출신자가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어, 이 두 가문이 조선후기 창녕 지역의 여론을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본 자료는 성근호(成瑾鎬)와 노재형(盧在馨)이 작성한 서문(序文), 향안 작성 당시 유향소의 운영 규범인 13개조의 입의(立議), 1600~1820년까지의 역대 향안, 성일경(成一慶)과 노영목(盧泳穆)의 발문(跋文)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성일경은 본 자료의 편찬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1940년 慶尙南道昌寧郡의 西山書堂에서 발행한 것으로 1600년부터 1823년까지 역대 昌寧鄕案 입록자를 망라해 놓은 자료
昌寧鄕案增註昌寧鄕案增註 卷之一昌寧鄕案增註 卷之一
[내용 및 특징]
17세기 전반에서 19세기 전반까지 지금의 慶尙南道昌寧郡 留鄕所 鄕員들의 명단을 망라해 놓은 자료이다. 유향소는 조선시대 국왕에서 監司, 守令으로 이어지는 관치행정 기구에 대항하여 조직된 일종의 지방자치기 기구이다. 유향소를 주도했던 세력은 지역별, 시기별로 차이가 있는데 대체로 17세기를 전후하여 해당 고을의 재지사족들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었다. 특히 이 시기는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 체제가 확립되던 시기로 사족들은 유향소 鄕員들의 명부인 鄕案을 배타적으로 작성해 나감으로써 자신들의 지위를 확고히 나가려 했다. 즉 지역 출신의 명문 사족 중심의 향안을 작성하고, 그 입록 규정을 까다롭게 제정함으로써 吏族이나 富豪와 같이 사족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과 타 지역 출신 사족의 참여를 제한해 나갔던 것이다.
조선시대 慶尙道昌寧縣에서도 임진왜란 이후, 지역 재지사족의 주도 하에 향안 작성이 이루어졌음이 본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본 자료에는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에 향안 작성이 시작되었다고 나타나 있으며, 이때부터 1820년까지 26회에 걸쳐 입록된 향원들을 시기별로 수록해 놓았다. 입록자 성명 하단부에는 세주로 해당 인물의 인적사항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1940년 본 자료가 간행될 당시 편집을 주도했던 成一慶가 만들어 놓은 것이다. 19세기 전반기 이후 향안 입록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가 한 세기가 지난 이후, 향안 작성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하여 지역 출신의 유림인 성일경이 향안을 새롭게 중수하고 해당 인물의 성명 아래에 인적 사항을 세주로 기재하고 본 자료를 간행한 것이다.
본 향안은 입록자의 인적 사항을 세주로 첨가하였기에 『昌寧鄕案增註』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1卷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卷首에는 成瑾鎬와 盧在馨의 序文이 수록되어 있다. 이어 萬曆 28년(1600)의 鄕案 立議와 역대 座目, 그리고 卷末에는 成一慶와 盧泳穆가 작성한 跋文을 수록해 놓았다. 자료 말미 刊記에는 著作兼發行人으로 趙鏞淑, 印刷人 陳斗相, 印刷兼發行所로 西山書堂이라 기재해 놓았다. 인쇄는 慶尙南道咸安郡郡北面에서 이루어졌다.
『昌寧鄕案增註』의 서문을 작성한 성근호와 노재형은 본 자료 간행 당시 창녕 지역에서 활동했던 儒林이었다. 서문에는 본 자료가 작성되는 경위와 의의가 언급되어 있으며, 창녕향안의 유래를 간략하게 살펴 볼 수 있다.
먼저 성근호는 서문에서 『昌寧鄕案增註』의 편찬을 ‘孔子의 『春秋』를 지을 적에 游夏의 무리는 한마디 말도 끼어들 수가 없었다(作春秋 游夏之徒 不敢贊一辭)’의 故事를 인용하여 그 의의를 기렸다. 이어 향안은 원래 朝家의 盛典이며, 士族의 아름다운 규범이었으나 근래에 풍속이 병들고 士氣가 퇴폐해졌으며, 鄕綱이 바르지 못해 民들이 점차 夷虜와 魑魅의 영역으로 빠져들고 있다며 시세를 한탄하였다. 그리고 朝鮮에서 향안이 만들어지는 것을 ‘小昊가 쇠퇴하여 九藜가 亂德하게 되고, 民神이 雜糅하게 되어서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小昊之衰 九藜亂德 民神雜糅 不可方物)’ 사정으로 ‘하늘에 제사하여 神을 돌보게 하고, 땅에 제사지내게 하여 民을 돌보게(司天屬神使 司地屬民使)’ 하여 서로 侵瀆함이 없도록 했다는 『國語』의 故事를 인용해서 비유하였다. 그래서 향안을 운영하는 都廳과 有司의 선출, 立議와 座目의 작성, 春秋講信의 시행, 序次의 條理가 바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향안에는 職銜과 氏姓만이 기재되어 있어 훗날 賢愚가 煩紊해지는 폐단이 생길 수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 실재 萬曆庚子(1600)에 향안을 시작하고 300여 년이 지나 우리 後生들이 향안을 奉審하였는데, 姓이 같으나 行列이 어긋나고 貫鄕을 고증할 수 없어 후손된 자들이 그 계보를 제대로 밝힐 수 없음에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이에 지난 庚午年(1930) 여름에 小訥 盧相稷 先生에게 增註하는 것으로 자문을 구하였고, 族君인 成一慶가 諸家의 譜牒을 고증하여 職銜과 氏名을 예전 방법에 의거하여 쓰고 그 다음에 字와 生年, 그리고 父, 祖, 曾祖 3世와 外祖 및 妻父, 家祖 누구의 후손임을 기록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에는 增註를 한 성일경의 노고를 칭찬하며 서문을 마치고 있다.
이어 盧在馨도 서문을 통해 『昌寧鄕案增註』의 편찬 의의를 기리고 있다. 이에 따르면 州郡에 鄕案을 두는 것은 그 規가 엄정한 國令으로, 비록 어진 사대부가 있어 學識과 行治가 있더라도 그 출신과 가문이 미치지 못하면 향안에 기록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창녕의 향안은 향교 西室 위에 봉인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에 鄕人들이 모여 이를 열어 보았다고 나타나 있다. 이러한 昌山의 향안에는 宣廟庚子(1600)부터 純廟庚辰(1820)까지 지역 門閥 출신의 뛰어난 인물들이 수록되었는데, 다만 官職과 姓名 만이 기재되어 있어 훗날 杞宋無徵 하는 일이 생길까봐 우려하고 있다. 이에 성일경이 諸家의 譜乘을 참고하여 『昌寧鄕案增註』을 편찬하게 되었다며, 그 노고를 서문을 통해 칭찬하였다.
두 서문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창녕에서의 향안 작성이 1600년 이후부터 확인된다는 점이다. 현존하는 자료로는 임진왜란 이전에 창녕에서의 향안 작성 유무를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인근 울산이나 양산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이후, 倡義 경력을 가진 사족들이 중심이 되어 향안 작성이 이루어졌음을 추측 할 수 있다. 창녕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진격로에 위치하여 전란의 피해가 컸으며, 일찍부터 창녕을 탈환하기 위한 倡義 의병들이 많이 출현하였다. 당시 명망 있던 창녕 지역의 인사들은 郭再祐와 金沔 등 유력한 의병장의 휘하에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창의 경력을 가진 사족들은 전란이 끝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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