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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곡처사공 묘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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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4-12-03 14:24 조회 2,289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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澗谷處士夏山張公墓碣銘


 


      


 


 


20141130일 고유


(음력 109)


 


   


 


 


澗巖齋

 

 

 

 

 


 


澗谷處士夏山張公墓碣銘 並序


 


公諱是孝字德淵 吾張氏系出夏山 高麗忠烈王朝 知僉議府事寶文署太學士夏城君諡章簡公諱鎰 爲始祖 入朝鮮有諱友誠官至都承旨 生諱暉進士 生諱華和陵參奉 生諱順受 明廟丙辰登文科歷官戶曹正郞山陰縣監 於公爲曾祖 祖諱承吉朝散大夫有孝行 考諱之白世稱高行處士 亦有孝行 妣金海金氏贈參議潑女 生四男伯曰是文 仲曰是行號巖溪 季曰是亨 公序其叔 以仁祖辛未 生公于縣北高巖里第 公稟性仁善 容儀秀朗 奉事二親 能盡其孝 兄弟四人 敦篤友愛 公與巖溪公尤篤也 同姜之被 朝夕相依 怡怡湛樂 兼有切偲 公自少好讀書 手不釋卷 多有資益 鄕黨咸以望士期之矣 年至卅以澗赤先墳之傍 構一小齋 扁曰澗谷 欲修家業 而偶得疾不幸早卒 知公者 莫不嗟惜焉 慵窩李公文集有曰 公至孝稱於世云 張氏錫類錄所載 石淵李公有狀曰 諱是孝與其仲兄都事公 同其行誼 此則信語也 嗚乎 吾門以孝之言則 公與仲氏難兄難弟 仲氏以孝啓聞 爲贈爵蒙旌閭 又從子翼禎繼孝旌閭 然公無命而泯沒無聞可惜耳 卒年不傳 忌十月十二日 而縣北澗赤先塋下負癸之原其葬也 配昌寧成氏士人昌顯之女 墓公墓左麓負子之原 無育 時巖溪公定以其次子翼禧奉香火云 二孫曰涑滿俱以孝給復之典 涑子漢佐漢輔漢良 滿子漢佑漢弼 其中漢輔漢弼又有孝薦 所謂夏山張氏六世八孝稱之 是也 公墓道尙闕顯刻 今者諸裔 會于澗巖齋 協謀治石 而屬仁鎭以阡銘 不肖同其羹墻之慕也 何敢辭諸 噫 公以孝友至行 不能自食其報 而至其子孫蕃衍 亦多有錫類者 不于其身 于其後者歟 係之銘曰


仁而樂善賦之天植 百源淸風能紹仲叔 有行不彰餘後報食 垂之爾類可徵永錫


歲光復後再甲午閏九月 日 從十二世孫 文學博士 仁鎭 謹撰

 

 


간곡처사 하산장공 묘갈명(역문)


 


()의 휘()는 시효(是孝), ()는 덕연(德淵)인데, 우리 장씨(張氏)의 선계(先系)는 하산(夏山, 지금의 昌寧)에서 나왔으니, 고려 충렬왕 때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 겸 보문서 태학사(太學士)로서 하성군(夏城君)에 봉군(封君)된 장간공(章簡公) 휘 일()이 시조가 된다. 조선조에 들어와 휘 우성(友誠)이 계셨는데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고, 그 아들 휘 휘()는 진사(進士)이며, 그 아들 휘 화()는 화릉참봉(和陵參奉)이다. 그 아들 휘 순수(順受)는 명종 병진년(1556)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戶曹正郞)과 산음현감(山陰縣監)을 역임하였는데, 이 분이 공에게는 증조가 된다.


조부의 휘는 승길(承吉)인데 조산대부(朝散大夫)로 효행(孝行)이 있었고, 아버지의 휘는 지백(之白)인데 세상에서 고행처사(高行處士)라 칭도 하였으며, 이 분도 효행이 지극하였다. 어머니는 김해김씨(金海金氏)로 참의(參議)에 증직된 발()의 따님이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맏이는 시문(是文)이고, 둘째는 시행(是行)인데 호()가 암계(巖溪)이며, 막내는 시형(是亨)이고 공은 셋째인데 인조(仁祖) 신미년(1631)에 창녕현(昌寧縣)의 북쪽 고암리(高巖里)의 집에서 출생하였다.


공의 품성은 인선(仁善)하고 용의는 수량(秀朗)하였으며, 부모를 섬기는데 효도를 다하였다. 형제 4인이 모두 우애가 돈독하였는데, 그 가운데 공과 중형 암계공이 더욱 도타웠으니, 강굉(姜肱)의 고사(故事)처럼 늘 같은 이불을 덮고 잤고, 아침저녁으로 서로 의지하면서 화락하고 즐겁게 지냈으며, 겸하여 간곡하게 권면하였다. 공은 젊었을 때부터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손에는 서책을 놓지 않아서 참된 이치를 얻음이 많았으니, 향당에서 모두가 명망 있는 선비가 될 것을 기대하였다. 나이 삼십에 이르러 간적촌(澗赤村)의 선영(先塋) 곁에 작은 집을 지어서 간곡(澗谷)이라 이름을 짓고 가업(家業)을 닦고자 하였다. 그러나 우연히 병을 얻어서 불행하게도 일찍 돌아가시니, 공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아까워하지 않음이 없었다. 용와(慵窩) 이공(李弘离)의 문집에 공은 지극한 효로써 세상에 칭송되었다.”는 말이 있고, 장씨 석류록(錫類錄)에는 석연(石淵) 이공(李禹世)의 행장에서 휘 시효(是孝)와 그 중형 도사공(都事公: 巖溪)은 행의(行誼)를 같이 했다.”는 글이 실려 있으니, 이것은 믿을 만한 말이다. ! 우리 가문(家門)에 효도로써 말한다면 공과 중씨 암계공은 난형난제(難兄難弟)이다. 암계공은 효행으로 조정에 알려져서 증직(贈職: 義禁府都事)과 정려(旌閭)가 내려졌고, 또 조카 익정(翼禎)도 효행을 계승하여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그러나 공은 명이 짧아서 행적이 묻히고 세상에 알려짐이 없었으니 아깝도다. 졸년은 전해지지 않고 기일(忌日)1012일이다. 창녕현(昌寧縣) 북쪽 간적(澗赤)의 선영아래에 계좌(癸坐)로 안장(安葬)하였다.


배위(配位)는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선비(士人) 창현(昌顯)의 따님인데 묘소는 공의 묘 좌측 기슭에 자좌(子坐)로 모셨다. 자식을 기르지 못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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