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강서원 역사자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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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4-08-09 14:36 조회 2,559회 댓글 0건본문
창녕 300년 역사 유적지
- 효자 3인, 학자 1인을 추모하고자 설립한 고강서원 -
고강서원 유허비각 설치 |
□ 소재지 :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억만리 괴산
□ 제향인물 : 김정철(金廷哲), 장시행(張是行), 손전(孫佺), 장익정(張翼禎)
□ 창건년도 : 1703년(숙종 29) 3孝子 享祀 / 1740년(영조 16) 4賢 合祀
□ 향사일 : 매년 2월, 8월 중정일(中丁日) / 1868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
▣ 연혁
창녕의 고강서원(高岡書院)은 1703년(숙종 29)에 고을의 명유(名儒)인 검암(儉庵) 손전(孫佺: 1634-1711)의 주도로 유림의 공의(公議)를 얻어서 창건한 것이다.
설립 당시의 사원(祠院) 이름은 고강리사(高岡里社)였고, 제향 인물은 증의금부도사(贈義禁府都事) 묵암(黙庵) 김정철(金廷哲: 1591-1662), 증의금부도사(贈義禁府都事) 암계(巖溪) 장시행(張是行: 1628-1688), 증공조좌랑(贈工曹佐郞) 청계(淸溪) 장익정(張翼禎: 1652-1697) 등 3효자(孝子)였다.
1740년(영조 16)에 검암(儉庵) 손전(孫佺)을 추향(追享)함에 따라 4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였다.
1806년(순조 6년)에 서원(書院)으로 승격되어 4선생을 매년 2월, 8월 중정일(中丁日)에 제향함과 아울러,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868년(고종 5년)에 조령(朝令)으로 훼철되었는데, 서원은 지금까지 복원하지 못하였다.
1961년에 고강서원 터에 순재(醇齋) 김재화(金在華)가 찬(撰)한 유허비문(遺墟碑文)을 돌에 새겨서 세웠다. 유허비의 높이는 180㎝, 넓이는 85㎝, 두께는 25㎝이다.
한편 하산장씨(夏山張氏)의 간암재(澗巖齋)에는 서원 훼철 당시에 조각난 ‘高岡書院’의 현판이 보존되어 있다.
2011년 5월에 김재화가 지은 ‘고강서원유허비’를 고강서원 옛터의 위쪽으로 옮겨 세웠다.
▣ 제향인물
1. 김정철(金廷哲 : 1591-1662)
자는 명숙(明叔), 호는 묵암(黙庵)인데, 본관은 금산(錦山)이다. 퇴계 이황의 재전제자(再傳弟子)인 부용당(芙蓉堂) 성안의(成安義)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덕이 높았다. 『부용당선생일고』의 부록(附錄)을 보면 부용당 선생의 전체 문인(門人) 40인 가운데 오직 3인의 제문(祭文)이 수록되어 있는데, 공을 포함하여 성흘(成屹), 노극형(盧克亨) 등이 올린 글이다. 효성(孝誠)이 지극하였으며, 졸한 이듬해인 1663년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의 증직(贈職)을 받고 정려(旌閭)가 내려 졌는데, 창녕군 고암면 억만리(괴산)에 세워졌다.
2. 장시행(張是行 : 1628-1688)
자는 덕원(德源), 호는 암계(巖溪)인데, 본관은 하산(夏山 : 일명 昌寧)이고, 고려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 장간공(章簡公) 장일(張鎰)의 후손이며, 산음현감 장순수(張順受)의 증손(曾孫)이다. 한강 정구(鄭逑)의 재전제자(再傳弟子)인 묵암 김정철(金廷哲)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덕망이 높았으며, 무첨당(無忝堂) 정도응(鄭道應), 다곡(茶谷) 허시창 (許時昌), 이의한(李宜翰) 등과 교분(交分)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였으니 12세에 아버지가 여묘(廬墓)에 거할 때는 3년간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고, 아버지 초상을 당해서는 애훼(哀毁)를 다하였다. 그후 어머니 초상을 당해서는 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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