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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상리 지명과 역사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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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5-03-05 12:02 조회 2,07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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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장씨 세거지중의 하나인 경남 창녕군 고암면 간상리에 관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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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상리[澗上里]

간상리는 고암면의 북부로 성산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깊은 골짜기의 마을이다 은 그뜻이 산골물 이며 상은 높은곳을 가르키니 간상리는 산골짜기 물이 흘러내리는 산골의 윗부분이라는 뜻이된다 이 간상리 골짜기를 간적[澗赤]이라 하였는데 흘러내리는 계곡의 물이 빨갛다는 말이니 곧 임진왜란때 의 혈전을 두고 이르는 지명 이다 속칭 간상 골짜기를 시치골 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왜병이 시치고 지나갔다는 뜻이니 시치고 는 스치고 의 이곳 지방발음 으로 흉악무도한 왜군이 스치고 지나간 마을마다 집과 재산 인명피해가 엄청났으니 이 골짜기의 피해가 또한 너무나 커 핏물이 내를 붉게 물들였다 한다 임진란이 터지자 당시 창녕 사람들은 귀천 상하를 구분할것없이 적을 격퇴하는데 전력을 다 하였고 한사람도 적에붙어 부역하는자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군은 창녕현이 있는 창녕을 점령한후 현풍으로 가기위해 고암으로 북상하여 이곳 간상리를 거쳐 대합으로 나아가게 되었는데 창녕의 의병들과 인근마을의 사람들이 이곳 대산성에 모여들어 싸우게되었던 것이다 이 싸움을 대산성 싸움이라 한다[창녕군지] 성은 목책을 둘렀다 많은 적병과 마주쳐 최후의 한사람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니 골짜기의 시내는 핏물이 흘렀고 산천을 붉게 물들이니 간적이라 부르게 된것이다 행정리로는 간상 1개리 뿐이나 자연마을은 여러곳 있다

 

 **간상

법정 행정리 명칭으로 지치 골짜기 안의 일대를 말한다 안골 중마 아랫마 감나무골 버들 남간제 새마 딱밭골 등 여러 마을이 있다

 

**시치와 간적

임진란때 왜군이 스쳐 지나갔다고 하여 시치라 부른다 시치는 스치다의 이곳 토박이 말인데 시치안에 시치본동외에 중마 아랫마 등 세뜸이 있다 북쪽에 서낭당이 있어 매년 정월 보름에 당제를 지낸다 또 간적이라 함은 시치골안에 대산이 있는데 임진왜란때 창녕현에서 나온 군사와 의병 난민들이 이골짜기의 대산성으로 집결하여 왜군과 결전을 한 곳이다. 대산성의 싸움이 치열하여 많은 사람이 죽어 그들이 흘린 피가 내를 이루어 흘러 개울이 붉게 물들었다하여 붉은산골물 이란 뜻으로 간적이라 불렀다

간암재[장명언 강학 봉선소]

우간재[조상() 묘각]

춘우정[조응린 묘각] 등이 있다

 

 **안골

시치 골짜기 안에 있으며 제일 안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안골 내곡이라 불린다 시치의 안 골짜기 마을이므로 시치안골 이라고 하기도한다 창녕장씨가 많이살며 10여호가 된다.(과거에는 20여호). 마을동쪽에 둘레 세아름되는 정자나무가 있다

 

**중땀

시치마을 중간에 있는 뜸으로 아랫마의 북쪽이다 중말 중마을이라 불리는데 12호가 산다 경주최씨가 많이 산다 동쪽 골짜기에 감로사가 있다 절뒤 바위에서 맑고 단 물이 흘러나와서 감로사라 하였다 한다

 

**아랫마

시치마을중 아래뜸으로 신촌의 바로 북쪽에 있다 서쪽으로 시치내를 건너면 임진왜란때의 최초의 격전지인 대산성이 있다 12호가 살고 있으며 경주최씨와 창녕조씨가 많이 살고있다

 

**버들

시치골짜기 첫머리에 8호가 사는마을로 버드나무가 많이 있는곳이라 하여 버들 柳洞 이라 하였다 동리안 골짜기를 버들골이라 부르는데 이 안에 명도사라는 절이있다

 

**감나무밑

버들의 바로 위에있는 뜸으로 감나무가 있다하여 감나무밑이라 부른다 5호가 살고있다

 

**새마

감나무밑 바로 북쪽에 있는 뜸으로 새로 생긴 마을 이므로 새마라 불리었다 3호가 산다

 

**남간

감나무밑 서쪽에 있는 마을로 시치내를건너 동향의 마을이다 남간이라 불린것은 간적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란데서 왔다6호가 사는데 남간재 [() 묘각] 이 있으며 이 제각옆에 괴목나무가 있는데 둘레가 세아름쯤된다

 

**딱밭골

딱밭이 있었다하여 딱밭골로 불린다 도천 동쪽으로 시치내 건너에있는 골짜기로 전에 집이 6집 있었으나 지금은 2집 뿐인 골짜기다 제곡이라고 하는데 저곡의 와전이다 제곡 소류지가 있다

 

**시치골

간상리 골짜기 일대를 시치골이라 부른다 시치마을의 유래와 같다

 

**대산

시치아랫마의 서쪽 산으로 서북에서 흘러오는 내를따라 골짜기 도로등이 이산에서 휘어져 남으로 돌아간다 이곳산에 남아있는 성터를 대산성이라 하는데 임진왜란때 창녕현민이 목숨을바쳐 싸운곳이다 성터 진터 등이 남아있다

 

**대산성터

대산에 있는 임진왜란때의 격전지인 성터로 목책성 으로 알려져있다 지도상에는 위치를 틀리게표시하고 있는데 대산성의 위치가 왕재산 아래 산중턱 이라 했는데 시치앞으로 정정 되어야 한다 아마 왕재산도 왕령산성이 있는데 이를 동일시한듯하다

 

**진터

대산성으로 진을쳤던 곳이라 하여 진터라 하는데 대산의 두봉우리 사이의 골짜기인 고루골에 있다

 

**고루골

고리골 이라고도 불리는데 대산북쪽 봉우리와 남쪽봉우리 사이의 골짜기인 진터라 불리는곳이 잇고 일대가 대산성 성터이다 고루는 고리의 와전으로 고리는 둥글게생긴 두봉우리가 서로엉켜있는데서 고리골 이라 불린 것이다

 

**유남산

[동국여지승람]에 유남산이 현의 북쪽 10리에 있다 로 기록되어잇고 [대동지지]에도 북십리라 했으나 [창녕현읍지][창녕현지]등에는 "재현 북 삼십리 자()()산래" 라 하여 산의 소재가 20리나 차이나게 기록되어있어 어느산을 가르키는지 분간하기 어렵게 되어있다 옜지도를 참고하여 삼십리 로 볼경우에는 왕재산 이며 십리로 보면 경산원 이 있는 방어산이 된다

 

**왕재산

왕재만해도 크고 높은산을 말하는데 이 덧붙여진 형이다 시치골짜기 북쪽에 높이솟은산으로 안골뒤의 서쪽 봉우리는 250 미터 이고 시치 본담의 뒷봉우리는 420 미터 이다 이산은 성산면 냉천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산 위에도 산성이 있으니 왕령산성 이라 불리는데 날씨가 가물면 기우제를 지냈던곳인 무제터가 남쪽 중턱에 남아있다 또 임진란때 군사들이 인근 비슬산과 화왕산을 연결 연락하던 봉화대 터가 남아있다

 

**왕재고개

그냥 왕재 라고도한다 []는 산 고개의 뜻으로 두루 쓰이는데 시치본땀에서 성산면 운봉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길이 두갈래나 있는데 하나는 화산등 하나는 뒷골에서 오른다

 

**절골

감로사가 있는 골짜기라 절골이라 부른다 절골동편에 나있는 고개를 넘으면 성산면 방리 음지마을에 이른다

 

**땅재골

중마와 아랫마 사이 동편에 있는 골짜기로 땅재골 못이 입구에 있다 왕재산 아래 골짜기로 왕재가 땅재로 와전된듯 하다 또는 당집이 있어 당재로 불린것이 땅재로 되었는지 모른다

 

**화산등

시치 뒷쪽으로 왕재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골짜기로 꽃뫼라는 뜻을가진 등성이다

 

**뒷골

시치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 이다 왕재산 남쪽 기슭이며 화산등의 서편이다

 

**새이골

시치 안골의 북쪽의 골짜기로 왕재산 아래이다 새이는 새+이 형으로 새 는 사이[]을 말하는데 사이의 줄임말 이다

 

**밤실고개

시치서 서쪽으로 대합면장기리 밤실과 무솔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개복고개

시치못 안골에서 남쪽으로 대합면 장기리 개복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므로 개복고개라 한다

 

**안산

시치안골의 남쪽에 있는 산으로 동리의 앞산이므로 안산이라 부른다 높이는 190 미터 이다

 

**새마뒷산

새마동쪽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370 미터 이다

 

**버들앞산

버들골의 남동쪽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138.9 미터 이다

 

**시치들

시치앞에 잇는 들로서 시치의 골짜기를 흐르는 내를 시치내 라 부르듯 시치골 안의 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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