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문의 《경재선생유고(敬齋先生遺稿集)》에 수록된 창산군파 장계증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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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진근 작성일 14-08-18 07:43 조회 2,103회 댓글 1건본문
남수문(南秀文)은 조선 세종 때의 학자로서 자는 경질(景質), 호는 경재(敬齋)이다. 본관은 고성으로 이조참판 금(琴)의 아들이다. 1426년(세종 8년)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 1436년 중시에 장원하여 호당(湖堂)(독서당)에 들어갔으며 집현전의 학사로 뽑혔다. 유의손(柳義孫)·권채(權採)·신석조(辛碩祖) 등과 같이 있었으며 문장이 우수하여 한때 이름을 날렸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초고는 대부분 수문이 썼다. 윤회(尹淮)와 함께 술을 즐겨 도를 지나칠 때가 많았으며, 세종은 그의 재주를 아꼈으므로 석 잔 이상은 마시지 말게 한 바 그 후로는 큰 잔으로 마시니, 세종은 이 말을 듣고 술을 주의시키는 것이 도리어 술을 권하는 것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직학(直學)에까지 이르럿으나 일찍 죽었다. (이홍직 편, 《새국사전》, 교학사, 291쪽 참조)
그는 장자 아자(張莪) 할아버지와 동방(同榜)이었다. 동방(同榜)이라 함은 같은 과거에 급제하여 방목에 이름이 같이 적힌 사람을 이르는 말로서 동년(同年)이라고도 하는 바, 형제처럼 다정하게 지냈으며, 그 자제분들은 아버지로 모셨다.
그의 문집인 《경재선생유고(敬齋先生遺稿)》에는 장계증과 관련된 기록을 남기게 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검열 장공 계증이 일본으로 탁발을 떠나는 일본 중 광궤(光軌)의 시축에 지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시를 지어 주게 되었다는 일종의 서문을 통해서 경재선생 남수문이 일본 중을 위한 시를 지어 준 것을 알게 될 것이며, 그 부탁을 한 것은 바로 계자 증자 할아버지였다.
이러한 사실은 《세종실록(世宗實錄)》 권 98, 세종 24년 12월 정미일 기사에, "일본 중 광궤(光軌)가 시를 지어 달라고 요청하매, 문신으로 하여금 시를 지어 주도록 하였다"는 기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할 것이다.
당시 계자 증자 할아버지의 요청으로 남수문이 써 준 시의 제목을 우리말로 옮겨 보자면 "검열 장계증 공이 수행하러 떠나는 일본 중 광궤의 시축(詩軸)에 제를 청하여 쓴 시"라는 제목의 시이다.
《檢閱張公繼曾請題送遊方僧光軌詩軸》
軒仰萬里鶴, 飛來自海東
太液春破璧, 上林照日紅
撫翼戱祥風, 却承睿恩降
惟東有枳達, 雪嶽攢靑空
仙山乃所戀, 高逝謝塵蒙
物性有自適, 六合爲攀籠
孤標儘可尙, 肯與鶴群同
渡海還舊棲, 千松翠鬱蔥
이 시를 우리말로 번역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만 리 높이 나는 학 새
일본에서부터 날아왔네
태액지 연못에는 봄 물결 푸르고
상림원 동산에는 아침 해 붉었네
날개를 들어 상서로운 바람 일으키니
문득 임금이 내려주신 은혜를 받았네
오직 동쪽에는 금강산이 있는데
설악산은 푸른 공중에 솟아 있네
신선이 사는 산이 바로 그리워 하는 곳
티끌세상 버리고 고아하게 가려고 하네
물건의 성품은 오직 유유자적 하는 것,
천지사방은 갇혀 있는 세장일 뿐이라네
고고한 모습 참으로 고상한데
어찌 닭의 무리와 같이 할까
바다 건너서 옛 집으로 돌아가니
천 개의 소나무 푸르고 울창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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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기님의 댓글
장경기 작성일훌륭한 자료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