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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항복(오성대감)의 발자취를 찾아서

글쓴이 장형근 작성일 2017-09-08 08:58:55 조회수 398



 

떡잎부터 유별났던 국난타개 영웅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에 있는 화산서원. 오성부원군 이항복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1635년 창건된 서원으로 고종 시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71년 복원됐다. /사진작가 황헌만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일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삶을 제대로 평가하여 역사적 지위를 올바르게 인정받을 수 있는 일처럼 의미 있는 일이 있을 것인가. 조선 중기 명종 11년인 1556년에 태어나 광해군 10년인 1618년에 63세로 서거했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백척간두에 서있던 나라를 구하고 학문과 문장 및 탁월한 경륜으로 나라를 중흥시킨 위인이다. 평가해준 후학이나 후배들이 있었기에 실행했던 일에서 크게 부족함이 없는 역사적 평가를 받아 후세에 길이 큰 이름을 전하는 몇 안되는 인물 중의 한 분이다.

이른바 조선 4대 문장가 중의 한 분인 계곡 장유(張維·1587~1638)는 대제학에 우의정이라는 높은 지위에 오른 분으로 이항복의 문집인 ‘백사집’의 서문을 썼는데, 그 글에서 하늘이 백사공을 태어나게 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어려운 국난을 해결할 수 있는 뛰어난 인물을 내어서 책임을 맡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고 그의 위대함을 설명해주었다. 장유는 또 다른 글 ‘오성부원군이공행장(鰲城府院君李公行狀)’이라는 장문의 이항복 일대기에서 “공은 나라를 유지케 하였고 은혜와 혜택은 백성들에게 미쳤으며 맑고 깨끗하기는 빙옥(氷玉)과 같았고 높은 산악처럼 무거웠으니 국가의 주석(柱石)이자 사류(士流)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분이었다”라는 높은 찬사를 바쳤다.

4대 문장가의 또 다른 한 분으로 대제학에 영의정이라는 고관을 역임한 상촌 신흠(申欽·1566~1628)은 이항복과 같은 조정에서 벼슬하면서 인품과 능력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장유보다는 훨씬 선배이면서 이항복에게는 10년 후배인 그는 ‘오성부원군 신도비명(神道碑銘)’이라는 글에서, 백사가 63세로 세상을 떠나자 귀양지인 함경도 북청에서 선산이 있는 경기도 포천에 장사를 지낼 때까지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지위의 고하를 묻지 않고 모두 찾아와 울고 절하면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고, 장사를 지낼 때에는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고 군·관·민이 모두 찾아와 통곡하면서 제물과 제문을 바치는 사람이 끊일 줄을 몰랐다고 하였다. 위대한 위인의 죽음에 애도의 행렬이 이어졌는데, 그의 높은 인품을 방증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백사 이항복의 일생

경주이씨로 참찬(參贊)이라는 고관에 오른 이몽량(李夢亮)과 전주최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백사는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고 자라면서는 해학에도 뛰어나 만인의 귀염을 받았음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더구나 20세 전후하여 5세 연하의 당대의 위인 한음 이덕형(李德馨·1561~1613)과의 친교를 통해서 ‘오성과 한음’의 수많은 일화가 전해지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오성과 한음은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하여 같은 조정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승승장구로 벼슬이 올랐지만, 두 사람의 넉넉한 아량과 국량 때문에 서로 간에 경쟁관계임을 잊고 세상을 뜨는 날까지 한치의 어긋남 없이 대제학에 이조판서와 영의정에 오르는 고관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면서 국가의 난국을 해결하는 데 동심협력하여 지혜를 짜내 임진왜란과 광해군의 폭정을 극복해내는 경륜을 발휘할 수 있었던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역사에 전해주고 있다.

백사는 9세에 아버지를, 16세에는 어머니를 잃는 불행을 당한다. 갑자기 고아가 된 백사는 실의에 빠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큰 뜻을 이루려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백사는 태어날 때부터 일반적인 출생과는 달랐다고 한다. 태어나 며칠 동안을 젖도 빨지 않고 울지도 않았는데 점쟁이가 듣고는 반드시 정승이 될 사람이라고 미리 점을 쳤다는 것이다. 영의정을 지낸 고관인 권철(權轍)은 이항복의 이웃집 노인이었다. 앞으로 국가의 기둥이 될 인물임을 알아차린 권정승은 아들 권율(權慄)에게 사위를 삼도록 권하여 백사는 19세에 권율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권율이 누구인가.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을 이룩한 충장공 권율 장군이 아닌가. 백사와 권장군이 살던 곳은 당시 서울의 서부(西部) 양생방(養生坊)의 필운대(弼雲臺) 아래에 있던 곳이다. 지금은 종로구 필운동 88번지로 배화여고의 교정으로 포함된 지역이다.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 있는 ‘필운대’.  
골목대장이던 백사는 도원수이자 문무에 능한 권율의 사위가 되면서 더욱 공부에 힘쓰고 노력하여 선조 13년인 1580년에 25세로 알성시 병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다. 이 해에 이덕형도 20세로 을과 1인으로 급제하여 함께 벼슬을 시작했다. 다음 해에는 한림학사가 되고, 28세에는 율곡 이이(李珥)의 추천으로 이덕형과 함께 호당에 들어가 독서하고 또 홍문관인 옥당의 벼슬아치로 천거받았다.

# 율곡의 뛰어난 안목

사람은 아무리 잘나고 똑똑해도, 그 잘남과 똑똑함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면 발신(發身)할 길이 없다. 백사 같은 뛰어난 인물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어떻게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율곡은 백사보다 20세 위의 대선배로 그때 대제학의 자리에 있었다. 율곡은 대제학으로 있으면서 7인의 당대 인물들을 추천하여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영광을 안게 하였으니 7인 모두가 뒷날 고관대작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라에도 큰 역할을 하는 위인들이 되었다. 뒷날 좌의정을 지낸 심희수(沈喜壽), 대사헌을 지낸 홍이상(洪履祥), 좌의정에 오른 정창연(鄭昌衍), 이항복, 이덕형, 병조참판에 오른 이정립(李廷立), 참찬(參贊)에 이른 오억령(吳億齡)이 그들이다. 이항복·이덕형·이정립은 동방급제로 이른바 경진(庚辰)년의 동방이어서 ‘경진3인’이라고 일컬었으니, 요즘 말로는 ‘삼총사’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 율곡처럼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기에 백사나 한음은 발탁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여러 벼슬을 지내며 경륜을 쌓던 백사는 35세인 선조 23년에 마침내 당상관인 동부승지에 올라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시종신(侍從臣)이 되었다. 37세인 선조 25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도승지로서 임금을 모시고 임진강을 무사히 건넌 공을 인정받아 이조참판에 오르고 오성군의 군봉을 받았다. 바로 이어서 평양에 도착하자 형조판서에 오르고 병조판서로 옮겨 왜군 격퇴의 지휘봉을 쥐게 되었다. 40세에는 이조판서에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는 높은 지위에 올랐다. 전란 동안에 다섯 차례나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군권(軍權)을 잡고 적군을 물리치는 최대의 지혜를 발휘하였고 다정한 친구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 군대의 원병을 요구하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병조판서라는 직책에 있으면서, 명나라에 들어가 명나라 황제를 설득하여 지원병이 들어오는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망한 나라가 중흥의 길이 열린 것은 바로 백사의 이런 경륜과 지혜에서 나왔다.

임진왜란 중에 이보다 더 어려운 난국은 중국의 정응태(丁應泰)라는 사람이 조선을 무고하여 조선이 명을 침범한다는 거짓 보고를 올린 사실이다. 만약 명나라에서 조선을 적국으로 여긴다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선조 31년 마침내 우의정이라는 정승에 오른 이항복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필마단기로 명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설득하는 외교력을 발휘했다. 정응태의 무고임을 밝혀내 끝내 명과 조선이 틈을 메우고 친한 이웃이 되어 왜군을 물리치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영의정에 오르고 왜군을 물리쳐 나라를 구해낸 공로가 인정되어 호성일등공신이 되어 오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래서 백사 이항복은 ‘오성대감’이라는 명칭으로 세상에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가다

나라를 중흥시킨 뛰어난 호성공신은 세월이 변하자 역적을 추천했다는 누명을 쓰고 낯설고 물선 먼 북청땅으로 귀양길에 오른다. 파란만장의 선조가 붕어하자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외교적 역량은 우수했으나 내치에는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말았다. 당파싸움이 치열해지면서 광해군은 이복형제를 죽이고 어머니 왕비를 폐비하는 큰 난리를 일으킨다. 이에 격분한 노대신 이항복은 굴하지 않고 죽음을 무릅쓴 항거에 나섰다. 이항복을 참수하라는 상소가 나오고, 끝내는 탈관삭직되어 망우리로 옮겨 은거했으나 유배명령을 받고 북청으로 떠나야 했다.

63세의 노정승이던 백사, 북청으로 가는 길에 눈물을 뿌리며 읊었던 시조는 지금의 우리 가슴도 슬프게 해준다.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원淚)를 비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본들 어떠리

의롭고 바른 말 한다고 늙은 재상을 귀양보내던 그 악인들, 63세의 노인 백사는 1618년 1월18일 회양의 철령을 넘으면서 피눈물이 솟아나는 시조를 읊었다. 그해 2월6일 유배지 북청에 도착한 백사는 뛰어난 시 한 수를 읊었으니, 그 마지막 구절이 너무나 답답한 심정이다.

‘겹겹이 싸인 산들이 정말로 호걸을 가두려는데(군山定欲囚豪傑)/ 고개 돌려 일천봉우리 바라보니 갈 길을 막는구려(回望千峯鎖去程)’라고 읊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막혔으면 그런 시를 지었으랴.

유배지에 도착한 후 3개월째인 1618년 5월13일 새벽닭이 울어 동이 틀 무렵에 백사는 63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평생 동안 그의 은혜를 입었고, 금남군(錦南君)이자 충무공의 시호를 받았던 유명한 장군 정충신(鄭忠信)이 백사를 수행했는데 시신을 거두어 선산이 있는 포천으로 6월17일 출발하여 7월12일 도착했다. 8월4일 소식을 들은 남녀노소가 달려와 울음으로 장사를 지냈다. 일세의 영웅 백사 이항복은 그때 이래 지금까지 포천에 고이 잠들고 계신다.

〈박석무|단국대 이사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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