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문헌자료실
전통상식
종인검색
종친사업체소개
문헌자료실
  > 자료실 > 문헌자료실

 조선시대 족보

글쓴이   관리자 작성일 2016-10-14 14:41:31 조회수 780

첨부파일1 : 조선시대 족보.hwp



조선시대 족보

                                                                                                                                              장인진(張仁鎭)

 

 

*본고는 필자의 족보자료의 문헌적 고찰(계명한문학회, 한문학연구, 9, 1994), 한국 족보의 문헌적 고찰(한국고전적보존협의회. 고전적, 3, 2007) 및 필자 공저, 한국 족보의 특성과 동아시아에서의 위상(계명대학교출판부, 2013), 33-105쪽 등에서 발췌한 것임

 

 

1. 머리말

 

족보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 가문의 계통을 시조로부터 부계(父系) 중심으로 알기 쉽게 표기한 것으로, 동일 혈족의 원류(源流)와 함께 결합된 인간관계를 밝히고 조상의 업적과 혈통을 존중하며, 종족간의 화목을 도모하고자 편집한 가문의 역사책이다.

예기(禮記)대전(大傳)편에 의하면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의 종법(宗法)을 밝히면서 인도(人道)는 부모를 섬기는 것이며, 부모를 섬기는 까닭으로 조상을 존경하고, 조상을 존경하는 까닭으로 종족을 공경하며, 종족을 공경하는 까닭으로 일족(一族)을 모우고, 일족을 모우는 까닭으로 종묘(宗廟)를 존중하여 엄하게 한다.”라 하였다. 또 주희가 지은 가례(家禮)를 살펴보면 사족(士族) 가문에서는 小宗’(高祖 중심)오복도(五服圖)’를 중시하여 제례를 행하고 있는데, 행사(行祀)의 대수는 4奉祀(高祖 중심)가 중심이 되었다.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抄)에 실려 있는 송나라 소순(蘇洵 : 1009-1066)족보인(族譜引)족보후록(族譜後錄)에 의하면 소순은 자신의 高祖를 중심으로 한 小宗미산소씨족보(眉山蘇氏族譜)를 만든 뒤 우리의 족보를 보면 효도공경하는 마음이 유연하게 생길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례의 소종법과 예기의 친친 존조(親親尊祖)의식을 수용한 것이다. 또 송나라 성리학자 정이(程頤 : 1033-1107)종족을 모우고 풍속을 후하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근본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收宗族 厚風俗 使人不忘本).”고 하였다. 예기의 수족(收族)정신을 수용한 것이다. 이로 보면 족보의 기원은 예기가례에서 비롯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현존하고 있는 출판 자료 가운데 최고본(最古本)1476(성종 7)에 안동에서 간행한 안동권씨가보(安東權氏家譜)(成化譜), 같은 해에 간행한 것으로, 이육(李陸)이 편찬한 철성이씨족보도(鐵城李氏族譜圖)(鐵城聯芳集소재)이다. 두 족보를 살펴보면 소씨의 족보와 같이 내외 자손을 수록한 高祖 중심의 小宗 족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565(명종 20)문화류씨세보(文化柳氏世譜)(嘉靖譜)가 경상도 의성에서 간행되었는데, 이 족보는 명종 때 의성에 귀양 중이던 류희잠(柳希潛)20여 년간 수집한 것을 경상·충청·전라도의 지방관원 191명이 편찬에 참여하여 10권으로 간행하였다. 이 책을 살펴보면 당시까지 유행한 小宗 중심의 족보(家譜)에서 탈피하여 내외 자손을 총 망라한 만성보(萬姓譜)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한 단계 발전된 족보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성씨는 조선 초기 자료인 세종실록지리지250, 1486년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277으로 확인되고 있다. 다시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17세기 이전까지 본관별(本貫別) 성씨가 수록되어 있는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성씨 본관이 4969,519임을 확인할 수 있고, 일제강점기까지 본관별 성씨가 수록되어 있는 청구씨보(靑邱氏譜)에서는 4921,207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후기로 오면서 성씨의 변화는 없으나 본관이 크게 줄어든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당초의 小宗(高祖 중심)本貫에서 후대로 오면서 예기의 수족(收族) 의식에 따라 大宗(시조중시조 중심)의 본관(本貫)으로 합족 대동화(合族大同化)한 것을 의미한다.

 

2. 족보의 종류

 

족보(族譜) : 모든 보첩류의 대명사이며, 本貫 단위로 편집하고 명휘자(名 諱字 : 이름)와 사적(事蹟), 혈연관계를 수록한 가문의 역사기록서

세보(世譜) : 두 종파(宗派) 이상이 同譜(合譜)하여 편찬한 족보

파보(派譜) : 한 파속(派屬)이 독립하여 편찬한 족보.

계보(系譜) : 종족(宗族)의 혈통관계를 표시하고자 하여 시조로부터 명휘 자(名諱字) 만을 계통적으로 나타내는 세계도(世系圖)

대동보(大同譜) : 시조가 같은 동성 동본(同姓同本)이나 동성 이본(同姓異 本)의 씨족들이 통합하여 편찬한 족보. 총보(總譜)라고도 한다.

만성보(萬姓譜) : 각 성씨별, 본관(本貫)별로 집대성한 계보

가승(家乘) : 본인 중심으로 편찬한 족보이다. 시조로부터 본인에 이르기 까지 직계에 대하여 사적(事蹟)을 수록하였다. 두루마리로 작성하여 휴 대하기도 하였다.

별보(別譜) : 한 계통이 동일한 시조의 후손으로 추정은 되지만 중간에 선계(先系)를 잃어버려 계통을 분명하게 정립하지 못할 때, 보청(譜廳)에 서 별도로 편집한 계보

선원보(璿源譜) : 역대 임금의 계보로, 종부시(宗簿寺)에서 편찬

돈녕보(敦寧譜) : 왕족과 그 외척의 족보로, 돈령부에서 편찬

잠영보(簪纓譜), 진신보(搢紳譜) : 內職外職에 벼슬한 가문의 계보

문보(文譜), 무보(武譜), 음보(蔭譜) : 文科武科에 급제한 가문이나 음 직(蔭職)에 벼슬한 가문의 계보인데, 본인 중심으로 8대조까지의 世系外祖, 妻父를 기록하였다. (,,赤色, 靑色, 黃色으로 표시)

청금보(靑襟譜) : 유학자(儒學者) 가문의 계보

남보(南譜), 북보(北譜) : 남인(南人), 북인(北人) 등 가문의 계보

팔고조보(八高祖譜) : 본인의 내외 高祖父 8인에 대한 가계보이다. (祖父 母內外祖, 外祖父母內外祖 계통도)

 

이상의 족보 가운데 세보, 파보, 계보, 대동보, 가승 등은 일반 족보라 하겠고, 선원보, 돈녕보, 잠영보, 문보, 무보, 남보, 북보, 팔고조보 등은 특수 족보라 할 것이다.

이 밖에도 내시(內侍)양세계보(養世系譜)’, 향안(鄕案)에 입록된 가문의 향보(鄕譜)’, 한 계통에서 장수(長壽)를 과시한 남극보(南極譜)’ 등이 있고, 한편으로 관아나 서원 등에서 작성한 노비안(奴婢案)’ 같은 것도 일종의 비()중심의 계보라 하겠으므로, 이로 보면 그 수가 엄청나다.

 

3. 족보의 편집

 

족보는 가문의 역사이다. 가문은 성씨로 나누어지는데, 세분하면 은 부계혈통을, 는 본관(本貫)을 뜻한다.

족보의 편집방법을 살펴보면 대체로 조선전기로부터 18세기 전반까지는 남녀 출생 순으로 편집하는 일종의 남녀평등의 종년차법(從年次法)’을 취함과 동시 외손의 경우는 무제한으로 수록하였다. 18세기 후반에 오면 남자를 여자보다 먼저 표기하는 일종의 남녀차별의 선남후녀법(先男後女法)’을 취하고 외손도 2-3(외손, 외증손)로 한정하여 수록하였다. 그리고 서자녀(庶子女)의 경우는 출생이 적자녀(嫡子女)보다 빨라도 선적후서법(先嫡後庶法)’에 따라 적자녀(嫡子女) 다음에 표기하였다.

이러한 족보의 편찬은 30년을 1로 하고, 11차 수정(三十年爲一世, 一世而一次修正)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족보 간행시에는 문중 회의로 보청(譜廳 : 譜所)을 설치하고 보규(譜規)를 정한 뒤 도유사(都有司), 도청(都廳), 교정(校正), 장재(掌財), 서사(書寫), 감인(監印) 등 임원을 선임하여 작업하였다. 그리고 보청에 수단(收單 : 修單)을 내어 족보에 등재하고자 하는 사람은 보청의 지방조직인 수단유사(收單有司)에게 족보단자(單草)와 수단비(冠童數에 따른 名下錢)를 납부하였다. 족보의 수단은 본인 신청주의를 취하고 있으므로, 수단을 신청하지 않을 때는 하계(下系)가 누락되기도 하였다.

족보란 한 가문의 역사서이며 그 편찬의 방법은 춘추(春秋)에 근거하므로 조선초기에는 편찬을 담당한 자들이 그 나름대로 역사의식을 갖고 작업에 임하였다. 안동권씨 성화보(1476)의 편찬 내용을 보면 남녀출생순의 종년차법과 외손계통의 무제한 표기 외에, 결혼한 딸이 개가(改嫁)함에 따른 後夫표기, 절순(絶孫)으로 인한 無後표기, 출생에 따른 전실(前室), 후실(後室), 부실(副室) 등의 소생(所生) 표기가 되어 있다. 뒤에 나온 문화류씨 가정보(1565)에서는 後夫가 드물었다. 이점은 당시 유교의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수용에 따라 1481년에 개가(改嫁)를 금한 바 있고, 또 유교의 귀천명분론(貴賤名分論)에 입각하여 서얼의 금고(禁錮)와 한품서용(限品叙用)을 규정하였던 경국대전등이 편찬되었기에, 후대 족보에서 後夫의 표기는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성화보와 가정보의 내용을 살펴보면 본손 계통과 함께 외손의 계통에서도 무제한 수록되어 있다.

조선전기 족보는 소종(小宗) 중심이었고, 그 본관(本貫)은 대개 거주했던 고을의 지명(地名)을 취한 것이라 하겠으므로, 그 수가 매우 많았다. 그런데, 후대로 오면서 본관수(本貫數)10분의 1로 감소하였다. 이 점은 앞에서도 밝혔듯이 조선후기로 오면서 대종(大宗)의 종법(宗法)이 세워짐에 따라 소종(小宗)의 각 성씨 본관(本貫)끼리 合族(收族) 대동화(大同化)한 것이다.

구한말 위계반(魏啓泮)은 장흥위씨(長興魏氏)의 족보를 편찬한 일이 있다. 당시 관북(關北)에 거주하던 한 종인(宗人)이 합보(合譜 : 合族)하려는 뜻을 전해옴에 따라, 지어 준 사례시(謝禮詩)가 실려 있다.

 

書來千里外 : 서신(書信)이 천리 밖에서 오니

寄送故鄕情 : 고향의 정을 붙여서 보내네.

一語誠珍重 : 한번 한 말 진실로 진귀하고 중하니

勿寒此日盟 : 이 날의 맹세 얼어붙지 말진저.

 

이러한 합족은 예기의 수족(收族)의 명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므로, 함께 족보(同譜)를 하는 때로부터 동성 동본(同姓同本)의 친족이 되어 대체로 종원(宗員)으로서 동등한 예우를 받게 된다.

족보 편집시 일족으로 추정한 가계라 할 지라도 선계(先系)를 알지 못할 때는 권말에 계통을 부기(附記)하여 별보(別譜)라고 표기하였는데, 이 계통은 후일에 고증을 거쳐서 원보(原譜)에 입록하였다.

족보를 간행한 이후에는 계통에 대한 평가가 따르기도 하였다. 즉 편찬을 주도한 계통을 원파(原派)라 하였고, 합족 대동화(合族 大同化)한 계통을 합보(合譜派), 별록에 수록된 계통을 별파(別派)라 하였다.

 

4. 족보의 내용

 

족보에서는 대개 서문(序文)과 시조(始祖)중시조(中始祖)파조(派祖)의 전기류(傳記類), 시조의 분묘도(墳墓圖), 시조 발상지의 도표, 항렬도, 범례 등이 순서대로 기재되고, 다음으로 족보의 본문인 계보도(系譜圖)가 있다.

계보도의 매 장(每張)은 대개 6층법(層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조를 一世(또는 )로 하여 층(: )마다 1()씩 표기한다. ‘의 표기는 시조나 파조로부터 대개 一二三숫자로 표기하는데, 예컨대 창녕성씨 기축보(1709)에서는 의 순으로 표기하였다.

世孫(代孫)이나 代祖(世祖)는 본인을 뺀 상하의 차례 계통을 말한다. 그러나 始祖 ○○5世孫'을 다르게 시조의 世系중심으로 표기할 경우, ‘始祖 ○○로부터 6라 하였다.

계보도 위 칸()과 아래 칸은 부자(父子) 관계가 된다. 수록할 칸에는 당사자의 행적과 그 배우자의 행적을 수록한다.

 

1) 부자(父子) 관계 표시

 

수록 당사자의 칸에는 이름이 들어가고, 이름 위에는 을 표기하여 연계(連系)를 하는데, 만약 후사(後嗣)가 없어서 양자(養子)를 들일 때에는 系子라 표기하였다. 딸은 대개 를 표시한 후 사위()의 성명과 본관(本貫)을 기록하였다. 다른 계통으로 출계(出系)한 자는 出後, 자손이 없으면 無後라 하였는데, 당사자 이름 아래에 표기하였다. 또 자손으로서 증거가 명백하면 후대에 와서 입록(入錄)하기도 하였다.

입계(入系)와 출계(出系)는 그 대상자의 친권자가 먼저 합의하고, 친족과 문장(門長)의 동의를 얻어서 예조(禮曹)에 청원(所志)한 후 임금의 윤허(允許)를 받아서 행하였다. 이 때 합의한 사항을 기록하여 당사자에게는 예조 입안(禮曹立案)을 발급하였고, 조정에서는 계후등록(繼後謄錄)을 기록하여 보존하였다. 족보를 편찬할 때는 이러한 입안(立案)의 내용을 심의하여 원안과 같이 수록하였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입계·출계의 예를 보면 친권자의 합의, 문중의 승인 등을 거친 후 족보 편찬시에 이를 심의, 수록하는 것이다.

족보에 수용되고 있는 계후(繼後)의 방법을 살펴보면 系子외에 系孫또는 系曾孫이 있다. 계손법(系孫法)은 당나라 백거이(白居易 : 772-846)의 백향산 고사(白香山 故事)에 따른 것이다.

한편 대종(大宗)이나 파종(派宗)의 종손(宗孫)은 종가(宗家)를 지키면서 제례를 주관하고 족의(族誼)를 다져야 할 책무가 있다. 만약 종손을 입계해야 할 일이 발생하면 문중에서 신중하게 논의하여 결정하는 것이다. 이처럼 종가를 지킬만한 인재를 가려야 하므로, 촌수(寸數)의 멀고 가까움, 본파(本派)와 타파(他派), 거주지의 원근(遠近) 등을 논하지 않고 장래가 촉망되는 자제를 가려서 입계하였다. 따라서 종손으로 출계하는 계통에서도 이 일을 영예롭게 여기는 것이다. 이 점은 출계한 자의 보주(譜註)承宗또는 入承大宗이라 표기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2) 이름(名諱)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이고, 죽은 뒤에는 라 하였다. 이름은 문중에서 정한 항렬(行列)에 따라 지었는데, 족보에 아명(兒名)을 수록했다가 뒤에 개명(改名)하기도, 동일 항렬자로 수차례 개명하기도 했다.

항렬은 호형 호척(呼兄呼戚)을 하는데 필요한 것이며, 대체로 오행상생법(五行相生法 : , , , , )을 취하는 가문이 많다. 그러나 가문에 따라 一二三의 숫자법, 십간법(十干法 : , , ...), 십이지법(十二支法 : , , ...) 등의 항렬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3) ()와 호()

 

()는 관례(冠禮)를 행할 때 지어주는 아명(亞名)이며, 다른 말로는 표덕(表德)이라 하였다. 후대에 를 바꾸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는 본명이나 외에 쓰는 아명(雅名)이다. 특히 학자, 문인, 예술가 등 명사들이 즐겨 썼으며, 스승이나 우인(友人) 등이 지어주는 경우가 많고, 스스로 호를 지어서(自號) 사용하기도 했다.

족보에 표기하는 호는 당사자 사후(死後)에 기록하는 것이 원칙이다.

 

4) 보주(譜註: 旁註)

 

이름자() 옆에 작은 글씨로 주()를 다는 것으로, 당사자 및 배우자에 관한 행적이다.

 

당사자 행적

·생년월일(대개 六十甲子)

·행적(受學, 科擧, 官職, 學德)

·졸년월일, 향년

·묘소 위치

·저술, 시호(諡號), 충효행(忠孝行)의 은전(恩典), 기타 업적

·평어(門中公論에 의한 논평)

 

배우자() 행적

·배우자 표기 : 대체로 ’(생전), ‘’(죽은 후).  ··구분도 있음 ·배우자의 본관(本貫), 성씨(姓氏), 생년월일

·처사조(妻四祖 : , , 曾祖, 外祖) 또는 처이조(妻二祖 : , 外祖)

·졸년월일, 묘소 위치

·종부직(從夫職 : 남편이 2이면 貞夫人), 贈職, 恩典 등 명기

 

묘소 형태 : 단분(單墳), 쌍분(雙墳), 합폄(合窆)

묘소 위치 : 소재한 지명(地名), () 이름 외에 24 방위표에 의거 좌향 (坐向 : : 子坐午向)을 표시하고, 비석(碑石), 지석(誌石), 표석(表石) 등이 있으면 기재하였고, 비석(碑石)의 글 지은이도 표기하였다.

 

5. 족보를 통해 본 양상

 

1) 귀천 존비의 신분 식별

 

족보의 내용은 호구단자의 표기법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존비(尊卑), 귀천(貴賤)이 적용되었다. 족보의 표기에서 동등(同等), 서차(序次), 귀천(貴賤), 존비(尊卑) 등은 부부(夫婦)와 부자(父子) 관계에서 성립이 되는 용어이다.

예컨대 남자의 행적 다음에 배우자를 기록하는 것은 동등한 신분의 夫婦 序次에 의한 것이다. 자녀 가운데 아들을 딸보다 먼저 표기하는 선남후녀법(先男後女法)은 동등 신분에서 본종(本宗)을 중히 여기고자 하는 男女 序次에 의한 것이고, 자녀출생순의 종년차법(從年次法)은 아들·딸 동등(同等)한 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배우자 표기에서 처()는 수록하고 첩()을 수록하지 않은 것은 부부 귀천(貴賤)의식에 의한 것이고, 적자녀(嫡子女) 다음에 서자녀(庶子女)를 표기한 것은 子女 존비(尊貴)의식에 따른 것이다. 또 배우자 표기에서 적자(嫡子), 서자(庶子)로 표기한 것은 등급(等級)을 둔 것이고, 庶子가 승적(承嫡)이 되어 제사(祭祀)를 받들 때는 적녀(嫡女) 위에 수록하는데 이것은 계통(繼統)을 중히 여긴데서 나온 표기다.

한편 딸이 왕비(王妃)가 되면 대두법(擡頭法)을 적용하여 계보도(系譜圖) 위의 칸으로 올려서 표기한 것은 王家士大夫家의 존비의식이 적용된 것이다.

 

2) 표기

 

족보의 내뇽 중에서 이름자() 바로 위에 의 표기는 존비(尊卑)의 상징이 되었으니, 즉 적자(嫡子)○○, 서자(庶子)庶子○○로 표기하여 구별하였다. 또 배우자의 경우, 가령 嫡配庶娶라 할 때, 서자의 계통(庶派)은 여러 대를 내려와도 그들의 배우자에게는 를 표기하여 적파(嫡派)와 구별하였다.

성씨 표기법에 있어서도 족보에 기록된 배우자의 姓氏를 살펴보면 대부분이 적파(嫡派)本貫 ○○라고 하여 를 사용하고 있으나, 서파(庶派)本貫 ○○○와 같이 표기하여 를 사용하지 않고 만을 기록해둔 것이다. 이 점은 관아에서 취급하는 호구단자(戶口單子)에서 적처(嫡妻), 서얼처(庶孼妻)으로 표기한 것과 동일한 형식임을 알 수 있다.

 

3) 표기

 

족보의 이름자 옆에 붙이는 도 의미가 크다. 자에 대해서는 위에서 설명했음과 같이 관례(冠禮)를 행할 때 지어주는 아명(亞名)이다.

는 적통(嫡統)의 자손에게만 표기하고 서자(庶子)에게는 표기하지 않는 것이 조선시대 관례였다. 여러 족보를 살펴보면 서자의 계통에 대해서는 비록 여러 대가 지나도 를 표기하지 않았다. 이 경우 위로 계통을 거슬려 살펴보자 않아도 바로 서자의 후손임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표기법은 족보 외에, 조선시대 일부 문무과(文武科)의 합격자 명부인 방목(榜目)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방목 가운데 문과에서는 대개가 를 표기하였으나, 문과와 함께 수록되어 있는 무과에서 를 표기하지 않은 방목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문무(文武)의 존비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4) 귀천의식(貴賤意識)에 의한 삭제

 

배우자 가운데 처()는 수록하고 첩()은 수록하지 않았는데, 이는 귀천의식에 의한 차별이다. 예컨대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윤원형(尹元衡)의 경우, 그의 첩() 정난정(鄭蘭貞)은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었음에도 尹氏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였다. 반란을 주도한 범죄자는 족보에서 삭제하였다. 영조 때 반란을 일으킨 정희량(鄭希亮 : ?~1728)의 경우이다.

 

5) 불명예 흔적

 

문중의 구성원으로서 명예를 더럽히는 행위를 하였거나 역신(逆臣)으로서 모반(謀反)하여 복주(伏誅)된 사람에 대해서는 족보에 그 성씨나 이름자를 四角形() 또는 圓形()으로 표기하여 남들이 쉽게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또 이와 같이 표기된 이름 옆에는 사유를 기록하였다.

이미 간행된 족보라 하더라도 이름을 더럽히는 행위를 한 경우에는 족보의 그 이름자에 먹물로 도말(塗抹 : 이름 먹칠)을 하거나, 그 이름을 칼로 도려내는[刀割] 경우가 있다.

  

6. 마무리

 

호적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앞으로는 족보가 더 소중하게 되었다. 이에 남성 중심적 가족문화를 개선하고, 가정에서 부부화합, 가족화목을 우선시 하며 새로운 가규를 세워야 할 때다.

가규를 세우면 내 성명을 소중히 여기게 되어 족보에 대한 관심도 자연 높아질 것이고, 뿌리 의식을 가정교육에 활용한다면 건전한 사회 풍토를 조성하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윗   글 :

세조 때 간행된 좌익원종공신녹권

아랫글 :

조선후기 역관 족보 논문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