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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향안

글쓴이 관리자 작성일 2015-03-04 15:13:30 조회수 1208



창녕향안

 

1940년 간행 창녕향안증주(昌寧鄕案增註)

1940년 지금의 경상남도창녕 지역에서 간행된 향안(鄕案)이다. 향안은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해당 고을 양반들의 지방자치기구인 유향소(留鄕所) 참여 인원들의 명단이었다. 즉 향안에 기재됨으로써 유향소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지역 여론을 주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본 자료에는 1600년부터 1820년까지 창녕향안(昌寧鄕案)에 기재된 인물을 망라해 놓았으며, 각 인물마다 인적사항을 세주로 기재해 놓은 자료이다. 모두 786명이 기재되어 있는데, 창녕성씨(昌寧成氏)와 광주노씨(光州盧氏) 두 가문 출신자가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어, 이 두 가문이 조선후기 창녕 지역의 여론을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본 자료는 성근호(成瑾鎬)노재형(盧在馨)이 작성한 서문(序文), 향안 작성 당시 유향소의 운영 규범인 13개조의 입의(立議), 1600~1820년까지의 역대 향안, 성일경(成一慶)노영목(盧泳穆)의 발문(跋文)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성일경은 본 자료의 편찬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1940慶尙南道昌寧郡西山書堂에서 발행한 것으로 1600년부터 1823년까지 역대 昌寧鄕案 입록자를 망라해 놓은 자료

昌寧鄕案增註昌寧鄕案增註 卷之一昌寧鄕案增註 卷之一

[내용 및 특징]

17세기 전반에서 19세기 전반까지 지금의 慶尙南道昌寧郡 留鄕所 鄕員들의 명단을 망라해 놓은 자료이다. 유향소는 조선시대 국왕에서 監司, 守令으로 이어지는 관치행정 기구에 대항하여 조직된 일종의 지방자치기 기구이다. 유향소를 주도했던 세력은 지역별, 시기별로 차이가 있는데 대체로 17세기를 전후하여 해당 고을의 재지사족들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었다. 특히 이 시기는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 체제가 확립되던 시기로 사족들은 유향소 鄕員들의 명부인 鄕案을 배타적으로 작성해 나감으로써 자신들의 지위를 확고히 나가려 했다. 즉 지역 출신의 명문 사족 중심의 향안을 작성하고, 그 입록 규정을 까다롭게 제정함으로써 吏族이나 富豪와 같이 사족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과 타 지역 출신 사족의 참여를 제한해 나갔던 것이다.

조선시대 慶尙道昌寧縣에서도 임진왜란 이후, 지역 재지사족의 주도 하에 향안 작성이 이루어졌음이 본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본 자료에는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에 향안 작성이 시작되었다고 나타나 있으며, 이때부터 1820년까지 26회에 걸쳐 입록된 향원들을 시기별로 수록해 놓았다. 입록자 성명 하단부에는 세주로 해당 인물의 인적사항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1940년 본 자료가 간행될 당시 편집을 주도했던 成一慶가 만들어 놓은 것이다. 19세기 전반기 이후 향안 입록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가 한 세기가 지난 이후, 향안 작성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하여 지역 출신의 유림인 성일경이 향안을 새롭게 중수하고 해당 인물의 성명 아래에 인적 사항을 세주로 기재하고 본 자료를 간행한 것이다.

본 향안은 입록자의 인적 사항을 세주로 첨가하였기에 昌寧鄕案增註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1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卷首에는 成瑾鎬盧在馨序文이 수록되어 있다. 이어 萬曆 28(1600)鄕案 立議와 역대 座目, 그리고 卷末에는 成一慶盧泳穆가 작성한 跋文을 수록해 놓았다. 자료 말미 刊記에는 著作兼發行人으로 趙鏞淑, 印刷人 陳斗相, 印刷兼發行所西山書堂이라 기재해 놓았다. 인쇄는 慶尙南道咸安郡郡北面에서 이루어졌다.

昌寧鄕案增註의 서문을 작성한 성근호노재형은 본 자료 간행 당시 창녕 지역에서 활동했던 儒林이었다. 서문에는 본 자료가 작성되는 경위와 의의가 언급되어 있으며, 창녕향안의 유래를 간략하게 살펴 볼 수 있다.

먼저 성근호는 서문에서 昌寧鄕案增註의 편찬을 孔子春秋를 지을 적에 游夏의 무리는 한마디 말도 끼어들 수가 없었다(作春秋 游夏之徒 不敢贊一辭)’故事를 인용하여 그 의의를 기렸다. 이어 향안은 원래 朝家盛典이며, 士族의 아름다운 규범이었으나 근래에 풍속이 병들고 士氣가 퇴폐해졌으며, 鄕綱이 바르지 못해 들이 점차 夷虜魑魅의 영역으로 빠져들고 있다며 시세를 한탄하였다. 그리고 朝鮮에서 향안이 만들어지는 것을 小昊가 쇠퇴하여 九藜亂德하게 되고, 民神雜糅하게 되어서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小昊之衰 九藜亂德 民神雜糅 不可方物)’ 사정으로 하늘에 제사하여 을 돌보게 하고, 땅에 제사지내게 하여 을 돌보게(司天屬神使 司地屬民使)’ 하여 서로 侵瀆함이 없도록 했다는 國語故事를 인용해서 비유하였다. 그래서 향안을 운영하는 都廳有司의 선출, 立議座目의 작성, 春秋講信의 시행, 序次條理가 바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향안에는 職銜氏姓만이 기재되어 있어 훗날 賢愚煩紊해지는 폐단이 생길 수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 실재 萬曆庚子(1600)에 향안을 시작하고 300여 년이 지나 우리 後生들이 향안을 奉審하였는데, 이 같으나 行列이 어긋나고 貫鄕을 고증할 수 없어 후손된 자들이 그 계보를 제대로 밝힐 수 없음에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이에 지난 庚午年(1930) 여름에 小訥 盧相稷 先生에게 增註하는 것으로 자문을 구하였고, 族君成一慶諸家譜牒을 고증하여 職銜氏名을 예전 방법에 의거하여 쓰고 그 다음에 生年, 그리고 , , 曾祖 3外祖 妻父, 家祖 누구의 후손임을 기록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에는 增註를 한 성일경의 노고를 칭찬하며 서문을 마치고 있다.

이어 盧在馨도 서문을 통해 昌寧鄕案增註의 편찬 의의를 기리고 있다. 이에 따르면 州郡鄕案을 두는 것은 그 가 엄정한 國令으로, 비록 어진 사대부가 있어 學識行治가 있더라도 그 출신과 가문이 미치지 못하면 향안에 기록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창녕의 향안은 향교 西室 위에 봉인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에 鄕人들이 모여 이를 열어 보았다고 나타나 있다. 이러한 昌山의 향안에는 宣廟庚子(1600)부터 純廟庚辰(1820)까지 지역 門閥 출신의 뛰어난 인물들이 수록되었는데, 다만 官職姓名 만이 기재되어 있어 훗날 杞宋無徵 하는 일이 생길까봐 우려하고 있다. 이에 성일경諸家譜乘을 참고하여 昌寧鄕案增註을 편찬하게 되었다며, 그 노고를 서문을 통해 칭찬하였다.

두 서문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창녕에서의 향안 작성이 1600년 이후부터 확인된다는 점이다. 현존하는 자료로는 임진왜란 이전에 창녕에서의 향안 작성 유무를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인근 울산이나 양산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이후, 倡義 경력을 가진 사족들이 중심이 되어 향안 작성이 이루어졌음을 추측 할 수 있다. 창녕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진격로에 위치하여 전란의 피해가 컸으며, 일찍부터 창녕을 탈환하기 위한 倡義 의병들이 많이 출현하였다. 당시 명망 있던 창녕 지역의 인사들은 郭再祐金沔 등 유력한 의병장의 휘하에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창의 경력을 가진 사족들은 전란이 끝난 후, 그 경력을 바탕으로 향촌 복구를 주도 할 수 있었다. 당시의 향촌 복구 과정에서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은 향안 작성을 통한 사족 중심의 지배질서체제 확립이었다. 창녕에서도 창의 경력을 가진 이들이 중심이 되어 향안 작성이 이루어졌으며 그들의 후손들이 19세기 전반까지 향안 운영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17세기 전반기 창녕향안 입록자의 경력과 후기 입록자들의 가계를 통해서 확인 할 수가 있다.

한편, 노재형의 서문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본 향안의 입록은 1820년을 끝으로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향촌 사회에서 향안이 가장 큰 권위를 가진 시기는 17세기 전후였다. 당시 사족들은 향안 조직과 그 운영 규범인 鄕規를 바탕으로 사족의 권위에 도전 할 수 있는 吏族을 통제해 나갔으며, 관권에는 협조하거나 때로는 공동 대응으로 견제해 나갈 수가 있었다. 하지만 1654營將事目 시행으로 인해 座首에게 營將을 보좌하는 임무가 부여함으로써, 사족들이 鄕任을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아울러 17세기 중반 이후 중앙 권력의 閥閱化가 진행됨으로써 지방 사족의 관로 진출이 어려워지자 사족들은 향촌 내 지위 유지에 주력하였고, 이 과정에서 사족들 간의 많은 갈등이 야기되었다. 거기다가 사회, 경제적 변화에 따라 새롭게 사족으로 성장한 新鄕 세력이 향권을 도전하게 됨으로써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가 흔들리게 되었고, 통일된 鄕論에 의한 향안 작성은 어려워졌다. 이러한 複雜多岐한 향촌 내 갈등은 향안의 권위를 크게 약화시켰고, 향촌 내 갈등으로 18세기 이후 향안 작성이 이루어지지 않는 고을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창녕에서도 1820년 이후로 향안 작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다. 다만 기존 향안을 망라하고 增註한 본 자료가 1940년에 간행 될 수 있었던 것은 종전의 향촌 내 갈등 요인이 20세기 이후 대부분 해소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 1940년의 昌寧鄕案增註간행은 예전처럼 향촌 내 지배질서 확립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향안 작성의 전통 계승과 향안 입록자 후손들 간의 결속력 강화를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성근호노재형의 서문 다음에는 성일경增註1600년부터 1820년까지의 향안이 망라되어 있는데, 향안 앞에는 13개조의 立議가 수록되어 있다. 향안은 1600년 당시의 것으로 여겨지는 座目新座目이 가장 먼저 수록되어 있는데 당시 입록자는 각각 6명과 29명이다. 이어 12명이 입록된 萬曆 35(1607) 716일 향안, 6명이 입록된 萬曆 42(1614) 정월 3일 향안, 14명이 입록된 萬曆 46(1618) 정월 27일 향안, 2명이 입록된 萬曆 47(1619) 1226일 향안, 29명이 입록된 天啓 2(1622) 정월 3일 향안, 3명이 입록된 崇禎 6(1633) 410修正舊案, 6명이 입록된 崇禎 6(1633) 410일 향안, 9명이 입록된 崇禎 11(1638) 정월 3일 향안, 5명이 입록된 崇禎 12(1639) 정월 3일 향안, 9명이 입록된 崇禎 15(1642) 정월 3일 향안, 2명이 입록된 崇禎 16(1643) 정월 3일 향안, 각각 1명씩 입록된 崇禎 17(1644)南明 永曆 2(1648)의 향안, 2명이 입록된 庚寅(1650) 정월 3일의 향안, 28명이 입록된 康熙 8(1669) 818重修鄕案, 34명이 입록된 戊戌(1718) 53일 향안, 2명이 입록된 乙卯(1735) 정월 11重修鄕案, 127명이 입록된 戊辰(1748) 정월 11鄕案及乙卯鄕案重修, 88명이 입록된 丁丑(1757) 215鄕案重修, 123명이 입록된 甲辰(1784) 417鄕案重修, 12명이 입록된 丙午(1786) 1217일 향안, 133명이 입록된 丁丑(1817) 2월 향안, 94명이 입록된 庚辰(1820) 66重修鄕案, 그리고 9명이 입록된 戊戌榜重修가 차례대로 수록되어 있다. 戊戌榜重修의 경우 가장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지만 입록자는 모두 17세기 전반기에 출생하여 17세기 중후반에 활동했던 것으로 확인되어, 소급 追錄한 인물로 생각 할 수 있다.

향안 앞에 수록되어 있는 입의 13개조는 다음과 같다. 하나, 春秋 講信한다. 하나, 鄕任公行이 의롭지 못한 자는 削迹한다. 하나, 鄕任品官下吏와 더불어 附耳語하는 자는 損徒한다. 하나, 鄕任의 임기는 周年이다. 하나, 매년 正朝品官의 서용이 이루어지는데 三不으로 한다. 하나, 長者凌慢하는 자는 영원히 損徒하고, 言辭不恭한 자는 定罰한다. 하나, 品官을 서용할 때에 잘못 천거한 자는 削迹한다. 하나, 아무 까닭 없이 新參禮를 행하지 않는 자는 削迹한다. 하나, 損徒 된 자가 僉議를 통해 解損되었는데, 行禮하지 않는 자는 削迹한다. 하나, 削迹 된 자가 僉議를 통해 解削되었을 때의 降損行禮는 위와 동일하다. 하나, 僉會 때에 아무런 까닭 없이 불참하는 자는 立庭하여 移時케 한다. 하나, 內外 鄕參 子弟別薦하고, 不一해야지 通可하는데 25세 이상만 서용한다.

이상의 13개조 立議萬曆 28(1600) 104昌寧鄕案이란 소제목 바로 뒤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600년 향안 작성 당시 만들어진 立議로 추정 할 수 있으며, 다른 지역의 立議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략하게 제정되어 있는 편이다. 위의 立議에서 주목할 점은 먼저 春秋講信禮의 실시이다. 春秋講信儀禮朱子增損呂氏鄕約에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16세기 이후 향촌 사회로의 성리학 보급과 더불어 성리학적 생활규범이 제시되어 있는 향약이 재지사족들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이것은 곧 유향소의 운영 규범인 鄕規에 적용되었다. 당시 사족들은 향약을 향규에 접목시킴으로써 향안 운영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제공받으려 했었다. 이는 향규에 있어서의 春秋 講信禮 시행에서 확인 할 수 있다. ‘三不으로 한다에 대한 규정은 명확하지 않으나 향안의 입록 자격인 三參 또는 三鄕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三參은 입록 후보자의 , , 外祖가 향안에 입록되어 있어야 후보자로 추천될 수 있다는 규정으로, 배타적 향안 운영의 일면을 보여준다. 조선중기 재지사족들은 지방자치기구인 유향소 참여 기준을 三參으로 규정함으로써 사족으로서의 성장을 요구하는 吏族他鄕 출신 사족의 입록을 제한하였다. 이를 통해 해당 고을 출신의 전통적 재지사족 중심으로 향안 운영을 꾀했던 것이다.

立議에 따르면 향안 입록은 매년 正朝에 이루어졌다고 하나, 後錄된 역대 향안을 살펴 볼 때 일정하지가 않았음이 나타난다. 또한 입록 간격도 일정치가 않은데, 후기로 갈수록 그 간격이 더욱 길어지며 입록자 수도 대규모임이 확인된다. 입록자의 나이는 25세 이상이며, 鄕會를 통해 可否가 결정된다고 하는데, 不一이어야 입록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심사자의 찬성률이 언급되어 있지 않아 단정 할 수는 없으나, 창녕향안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피추천자가 三參을 갖추었다고 해도 심사 때, 鄕論 일치가 이루어져야지 입록이 가능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입록 규정은 三參 조항과 마찬가지로 17세기 전반기까지는 엄정하게 준수되는 경향이 나타나지만, 그 이후에는 점차 완화되는 양상으로 변화하는데 향안 권위의 약화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가 있다.

昌寧鄕案 입록자는 모두 786명이 확인된다. 창녕향안 입록자의 성격은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부터 營將事目 시행 이전인 1650년까지의 향안, 1669~1748년의 향안, 1757~1820년 향안 등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우선 1600~1650년 향안 입록자는 136명으로 姓貫 분포를 살펴보면 昌寧成氏 58, 光州盧氏 9, 長淵盧氏 8, 瑞興金氏 7, 碧珍李氏 7, 晉陽姜氏 6, 密城楊氏 6, 廣州安氏 6, 晉陽河氏 5, 昌寧曺氏 5, 善山金氏 3, 密城孫氏 3, 淸州鄭氏 2, 昌寧張氏 2, 錦山金氏 1, 咸平李氏 1, 安岳李氏 1, 廣州李氏 1, 苞山郭氏 1명 순이며, 본관 미상의 李氏3金氏1명이다. 17세기 초반 향안에 이름을 올리며, 향안 운영을 주도했던 자들은 앞서 언급했듯이 대부분 임진왜란 때 창의 경력을 가진 인물들임을 성명 하단부에 기재된 세주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1600년의 座目新座目에 수록된 成天禧, 楊孝立, 曺說, 成定國, 李應元 등이 창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 후손들이 후대 향안에 다수 입록되어 있음이 나타난다. 한편 입록자의 성관 가운데 成氏가 당시 입록자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成氏, , , , 씨와 더불어 창녕土姓이다. 이 중 성씨와 조씨가 麗末부터 上京從仕하여 사족으로 성장하였으며, 특히 성씨의 경우 15세기 이후 중앙 관직에 여러 인사들을 포열시킴으로써 大姓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아울러 본관지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 분포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族勢를 바탕으로 조선중기 이후 창녕향안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창녕에 거주하며 향안에 입록된 他貫의 사족들은 麗末鮮初 토성출신의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은 후, 妻鄕 또는 外鄕에 거주하게 됨으로써 창녕의 사족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시기 입록자의 職銜을 살펴보면, 幼學83명으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어 奉事參奉을 역임한 인물이 각각 10명과 6명으로 나타난다. 그 외에도 別提, 判事, 訓導, 訓正, 主簿, 僉知, 守門將, 判官, 佐郞, 司成, 縣監, 監察, 部將, 宣傳官 등의 文武 관직과 司果 등의 西班 遞兒職, 忠義衛定虜衛 같은 兵種도 확인된다. 입록자 가운데 중앙 관료 출신을 비롯한 다양한 직함이 분포하고 있다는 것은 17세기 전반까지만 하더라도 지방 사족들의 중앙 진출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특히 1600년 향안 작성 시 座目新座目 구성원 35명 중 幼學은 단 8명만 나타나는데, 이는 곧 관력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족들에 의해 향안이 만들어졌고 그만큼 향안의 권위가 높았음을 의미한다. 유학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급증하는데 이는 중앙 관직이 閥閱들에 의해 독점되어 감으로써, 지방 사족의 중앙 진출이 점점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1669~1748년의 향안에는 모두 191명이 입록되었다. 姓貫 별로는 창녕성씨 64, 광주노씨 23, 진양강씨 11, 창녕조씨 10, 서흥김씨 9, 밀성양씨 8, 밀성손씨 7, 진양하씨 7, 坡平尹氏 5, 장연노씨 5, 광주이씨 5, 벽진이씨 5, 청주정씨 4, 광주안씨 3, 선산김씨 3, 창녕장씨 3, 水原白氏 3, 全州李氏 2, 河濱李氏 1, 達城裵氏 1명 순으로 나타나며, 본관이 확인되지 않은 노씨 6, 이씨 5, 김씨 1명이 입록되어 있다. 여전히 토성인 창녕성씨의 비중이 높게 나타나는데, 주목할 점은 광주노씨 입록자가 전시기에 비해 큰 폭으로 증가했다는 점이다. 창녕성씨와 더불어 광주노씨 가문이 18세기 중반 이후 창녕의 향권을 주도하는 가문으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7세기 전반기에는 확인되지 않았던 파평윤씨, 수원백씨, 전주이씨, 하빈이씨, 달성배씨가 새롭게 창녕 지역 향권 운영에 참여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입록자의 직함은 幼學181명으로 전체 입록자 중 95%를 차지한다. 그 외에는 及第 6, 僉使 1, 判官 1, 察訪 1, 生員 1명만이 확인될 뿐이다. 직함만을 보고 전시기 입록자와의 사회적 지위를 비교해 볼 때, 질적 저하가 뚜렷하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앞서 언급했듯이 17세기 중반 이후 중앙 권력의 閥閱化, 영장사목 실시로 인한 사족의 향임 기피 현상, 향권을 둘러 싼 사족 간의 갈등과 新鄕의 도전 등 사회적 변화에 따른 複雜多技한 요인들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곧 사족 중심으로 운영되는 향안 권위의 약화로 이어졌으며 상대적으로 幼學의 비중이 높아지는 원인이 되었다.

마지막 1757~1820년까지의 향안에는 무려 459명이 입록되어 있다. 성관별로는 창녕성씨 162, 광주노씨 76, 밀성양씨 26, 진양강씨 22, 파평윤씨 20, 창녕조씨 17, 선산김씨 17, 진양하씨 17, 광주이씨 14, 서흥김씨 14, 밀성손씨 11, 벽진이씨 10, 장연노씨 8, 광주안씨 7, 하빈이씨 6, 창녕장씨 4, 포산곽씨 3, 청주정씨 2명 순으로 나타나며, 본관이 확인되지 않은 이씨 11, 노씨 5, 김씨 5명이 확인된다. 여전히 창녕조씨와 광주노씨 가문 출신의 입록자가 많음을 알 수 있으며, 파평윤씨 입록자가 많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당시의 향안 입록 때는 당대 인물을 입록한 것은 아니다.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1757, 1784, 1786, 1817, 1820년의 향안 작성과 戊戌榜重修 이루어졌는데, 모두 重修 향안으로 18세기 초, 중엽에 활동했던 인물들을 입록하고 있다. 어떠한 연유로 한 세대가 지난 후에 重修된 향안에 입록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향촌 갈등이나 까다로운 입록 조건으로 인해 당대의 향안 입록에서 배제 또는 누락되었던 인물을 후대에 추록시키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18세기 중반 이후 여러 편의 중수향안이 만들어지게 된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다.

한편 당시 입록자의 직함을 살펴보면 幼學450명이다. 나머지로는 縣監 1, 進士 3, 出身 3, 生員 1, 佐郞 1명만 나타나, 유학의 비중이 무려 98%가 넘는다. 그나마 현감의 경우 창녕 출신의 사족이 아니라, 외지 출신으로 昌寧縣監을 지냈던 高裕이다. 高裕창녕현감 재임 시절 어진 정사로 이름을 널리 알렸으며, 高昌寧이라는 별호가 붙을 정도로 창녕과 인연이 깊었던 인물이다. 창녕향안 운영에 있어, 高裕의 구체적인 역할을 알 수 않지만, 향안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상징적 의미에서 高裕를 입록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 세 시기로 나누어 창녕향안을 살펴 본 결과 창녕성씨가 284명으로 가장 많은 입록자를 기록하였으며, 다음으로는 광주노씨로 108명이다. 두 가문 출신의 입록자를 합치면 총 392명으로 전체 입록자 중 49.9%를 차지하고 있어, 사실상 이 두 가문이 향안 작성을 주도한 것으로 생각된다. 실재 서문을 작성한 성근호노재형, 발문을 작성한 노영목昌寧鄕案增註를 편찬한 성일경이 각각 창녕성씨와 광주노씨라는 사실은 유향소를 중심으로 한 창녕의 향권을 조선후기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이 두 가문이 주도했음을 추측케 해준다. 한편 창녕향안 입록자 대부분은 18세기에 활약했던 인물로 절반 이상이 18세기 중엽 이후에 중수 향안을 통해 입록되었다. 본 향안의 立議에서 확인되는 三不 조항은 17세기 전반까지는 대체로 엄정하게 준수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까다로운 입록 조건으로 인해 이 시기 입록자도 후대에 비해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입록자의 규모는 급증하게 되는데, 17세기 중반 이후 향안의 권위 약화와 이에 따른 배타적인 향안 입록 조건의 완화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여겨진다.

향안의 권말에는 성일경노영목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먼저 昌寧鄕案增註를 직접적으로 편찬한 성일경의 서문에는 본 자료의 편찬 과정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戊辰年(1928) 봄 향교에서 聖廟禮를 행하고, 明倫堂에 모여 향안을 奉審하였는데 規範嚴正序次明白함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향안에는 官銜姓名만이 기재되어 있어 百世杞宋無徵하게 될 염려가 있다며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다 同年 향교에서의 秋謁을 끝낸 후 당시 경상남도 지역에서 명망 있던 유림 盧相稷 先生의 자문을 구한 후, 향안 입록자를 배출한 각 門中에서 소장하고 있는 譜乘을 참고하여 官銜姓名 이외에도 貫鄕, 表德, 生年, 別號, 官職事行淵源 , , 曾祖, 外祖, 妻父를 함께 기록하여 增註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때 수록된 각 성씨별 입록자 수를 성관 별로 나열하였는데 모두 784명이 수록되었다고 한다. 이때의 증주 작업은 대략 10여 년이 걸렸으며, 이 자료가 훗날 선대를 고증하는 자료로 활용되기를 바라며 발문을 마치고 있다.

발문에서 성일경은 본 향안에 784명이 입록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실재 昌寧鄕案增註의 입록자 수는 786명으로 확인된다. 또 당시 향안은 昌寧鄕校에 보관되어 있었으며, 향교 구성원들에 의해 봉심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韓末 鄕廳이 폐지됨으로써 향안 조직과 관련 자료는 해당 고을의 향교로 이속되었기에, 창녕향안도 창녕향교에 보관된 것이며 향교 구성원들에 의한 봉심이 이루어진 것이다.

마지막 노영목의 발문에는 성일경의 노고와 昌寧鄕案增註의 편찬 의의가 언급되어 있다. 10여년 간에 걸친 성일경의 노력으로 본 자료가 완성될 수 있었으며, 1939창녕향교에서 열린 鄕會에서 성일경手奉하는 과정을 거쳐 이듬해 昌寧鄕案增註가 간행될 수 있었다고 한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慶尙道昌寧縣 재지사족들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창녕에서 鄕案 작성이 확인되는 것은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부터이다. 당시 향안 작성을 주도했던 인물들 중 상당수는 임진왜란 당시 郭再祐金沔 휘하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倡義 경력을 바탕으로 전란 이후 향촌복구와 더불어 향안 작성에 참여할 수가 있었으며, 이를 통해 지역 내에서의 사회적 지위를 보장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창녕에서의 향안 입록은 1600년부터 1820년까지 이루어졌으며, 입록 양상은 시기별로 차이가 나타난다.

17세기 전반기만 하더라도 입록자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三不로 명기되어 있는 향안 입록 자격과 鄕薦에서의 通可不一의 규정이 엄밀하게 준수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재지사족들은 이러한 배타적인 향안 운영을 통해 향촌 내 지배질서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7세기 중엽 영장사목의 실시로 인한 사족의 향임 기피 현상, 중앙 권력의 벌열화와 이에 따른 향촌 내 사족 간의 향권 경쟁, 新舊鄕 간의 대립 등 複雜多岐한 갈등으로 인해 鄕論은 통일되지 못하였고, 그 과정에서 점차 향안의 권위는 실추되어 갔다. 17세기 중반 이후 창녕향안에 입록된 인물들의 職銜을 살펴 볼 때 幼學의 비중이 크게 증가함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가 반영된 것이다. 17세기 전반기 다양한 관직을 역임한 인물들이 입록되었던 것과 비교할 때 유학의 비중이 급증하여, 입록자의 사회적 지위가 저하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또한 향안 입록도 후기로 갈수록 대규모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창녕향안 입록자 중 昌寧成氏光州盧氏 두 가문 출신자가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두 가문이 조선후기 창녕 지역의 鄕論을 주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昌寧鄕案增註, 1940

嶺南士林派形成, 李樹健, 嶺南大學校 出版部, 1979

大邱史學26, 申正熙, 大邱史學會, 1984

1回 韓國學 國制學術會議 論文集, 가와시마 후지야,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79

昌寧郡誌, 昌寧郡誌 編纂委員會, 昌寧郡誌 編纂委員會, 1984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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