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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장간공의 초휘는 민(敏)이고, 자(字)는 이지(弛之)이며, 창녕의 호족(豪族)이다. 고려 희종 3년(1207)에 태어나서 고종 10년(1223)에 과거에 급제하고, 승평판관(昇平判官)에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며, 직사관(直史館)이 되었다가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옮겼다. 원종 초에 전라·충청·경상 삼도안찰사(全羅忠淸慶尙三道按察使)가 되었다가 이부낭중(吏部郎中)과 병부·예부의 이부시랑(兵禮二部侍郞),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가 되었다.

원종 10년(1269)에 국자제주(國子祭酒)로서 서경란(西京亂)을 토평(討平)하고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으며, 원종 12년(1271)에 삼별초군(三別抄軍)이 진도(珍島)에서 반거(叛據)할 때 공이 남방(南方)의 민심을 얻었으므로 경상도수로방호사(慶尙道水路防護使)에 제수되어 난을 진무(鎭撫)하였다. 그 다음 해에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고, 원종 14년(1273)에 전라도지휘사(全羅道指揮使),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동지공거(同知貢擧) 등을 역임한 후 충렬왕 1년(1275)에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 보문서태학사(寶文署太學士), 수국사(修國史)가 되었고, 하성군(夏城君)에 봉군되었다.

시조 장간공께서 관직에 재직하던 중 “8차례나 元나라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왔지만,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兪棨, 麗史提綱)는 기록이 있어서 원(元)의 침공이 있었던 고려 조정의 어려운 시절에 공께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한 것이라고 본다. 1276년 5월 3일에 향년 70으로 졸하시자 조정에서 장간공(章簡公)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고려사』의 사평(史評)을 보면 “성품은 온공 정직하고 글을 잘 지었으며, 행정을 수행하는 재주가 뛰어났다.”(性溫恭正直 善屬文 長於吏才) 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順天府」편과「慶州府」편에 장간공의 시 2수가 전한다.

연자루(燕子樓) : 순천(順天) / 순천의 ‘연자루’는 현재 중건 보존되어 있고, 장간 공의 연자루 시(詩)는 근대에 새로 만들어서 걸었다.
霜月凄凉燕子樓 : 서릿발 같이 찬 달빛 처량한 연자루(燕子樓)에는
郎官一去夢悠悠 : 낭관(郎官) 한번 간 후로 꿈만 유유하였네
當時座客休嫌老 : 당시 좌객(座客)을 늙었다고 혐의하지 마소
樓上佳人亦白頭 : 누각 위의 가인(佳人)도 역시 머리가 세었네


동경회고(東京懷古) : 경주(慶州)
四百年前將相家 : 4백년전의 신라 장군과 재상들은
競開臺사(木+射)幾雄誇 : 다투어 누대를 지었으니 그 웅장함 얼마나 자랑했을까?
只今繁麗憑誰問 : 이제 그 번성하고 화려했던 일들 누구에게 물으리
野杏山桃泣露華 : 들살구 산복사꽃이 이슬에 맺혀 눈물흐르듯 답해주네.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지은『동인시화』의 ‘의성관루’(義城館樓) 편에 의하면 시조 장간공의 아들 정하(廷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즉 시조공의 아들은 일찍이 의성현수(義城縣守)인 오적장(吳迪莊)의 딸과 약혼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조공의 묘소는 창녕군 대지면 용소리(龍沼里)의 헌진산(獻津山)에 계좌(癸坐)로 모셔져 있으며, 의성인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가 지은 비문(碑文)의 묘비(墓碑)가 세워져 있고, 지난 1988년에 이 비문을 번역한 국역비(國譯碑)를 별도로 세웠다.
제 파(諸派)의 후손들이 참사하는 묘사는 음력 10월 첫 일요일이며, 한편 용소리 동민들이 매년 정월 보름날에 우리 시조공의 묘소에서 동제(洞祭)를 지내는 것이 고래(古來)의 전통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 동국통감, 동인시화, 여사제강, 창녕읍지 등